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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원격예배와 매체 - 코로나19가 가져온 불가피한 변화일까?



빌렘 플루서 Vilém Flusser 가 이야기한 텔레마틱 사회 Telematic Society 는 “인간이 실제로 창조한 사회 중 최초의 자유로운 사회”라는 주장했음을 짚어 볼 때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원격예배나 재택근무, 원격근무를 텔레마틱 사회의 한 유형으로 보기는 어려워보인다. 플루서가 이야기하는 텔레마틱 사회는 단순히 원거리 소통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문자적 느낌은 아무래도 그런 냄새가 많이 나지만) 민주적 대화망 구조에 초점을 둔 것이다. 플루서가 어떠한 결과적인 모습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대화구조와 흐름에 중점을 두는 것은 그가 다양한 의사소통 유형들을 먼저 논했음을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는 흐름이다.


마샬 맥루한 Herbert Marshall McLuhan 은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고, 플루서는 미디어가 코드를 전달하고,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양측의 어느 주장을 봐도 메시지와 매체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싶다.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인간이라면 분명 수용방법과 여건은 매우 큰 영향을 주게 되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제는 어떠한 주제어나 표제를 잡을 때 해시태그(#)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행동이 되었다.

현재 많은 종교단체들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집회 등 예배행위를 자제하고 있고, 그것을 대신해 기존 인프라 혹은 자체적인 영상중계 시스템을 이용해 원격예배를 시도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과 선택을 두고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사실 그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나는 특별히 정기모임에 무게를 많이 두는 교회들의 갈등은 충분히 건전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해온 것이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오만일 것이다.


전달 매체를 담론적 미디어로, 공간을 대화적 미디어로 이분화해서 본다는 것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조금만 생활을 돌아보면 이러한 미디어들의 ‘융복합’을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담론적 미디어가 가득한 대화적 공간 속에서 다시 이러한 것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관계하고, 작용하고 또한 반응한다.



이 제식은 적합한가?


사실 근본적인 질문은 현재 인류의 종교들이 가진 제식의 방법이 과연 적합한 방식인가 하는 부분일 것이다. 미디어가 메시지가 되고, 미디어가 코드를 전달, 작동하게 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제식'은 곧 메시지가 되고, 코드를 전달하고 또한 작동하게 만들어주는 미디어 즉, 매체이다.


때문에 성례전과 같은 제식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행동에 대해 수많은 의미부여가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본디 삶의 비참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회피가 필요하고, 형식과 의례를 통해 개인과 집단이 가진 무능함과 저능함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는 집단일수록 형식과 의례를 중시하고, 설득력이 없는 사상일수록 폭력적인 것처럼 예배와 제식도 자칫하면 이러한 함정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의례화 된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그것들에 부여된 의미와 작용을 잊은채 자기중심적인 자기나름의 해석을 가하고 그렇게 수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종교의 제식 즉, 예배의 행위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가 느껴왔던 사실이다.


원거리, 동영상 예배라는 행위에서 오는 불안감이란 그런 의례적 강제성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느낄 허무함과 안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회중은 더 제멋대로 굴게 될 것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포함한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것이 사사 기드온이 전쟁에 나가기 전 300명만을 남겨야 했던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서의 강제성, 오히려 더 큰 자발성, 마음의 상태가 더 복잡해질 수 있을 때 자신을 다잡고 중심을 잡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이후 더 건전한 조직이 만들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제식은 무엇이었을까? - 역사적 관점에서


인류의 문화들이 큰 줄기에서 배경이 되는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는 정리되어 나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바울이 '성찬'을 이야기 하듯이 '기념'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역사와 사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확립하려는 생각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힌두교와 일본의 신토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신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까닭은 매우 다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개념과 현실이 꽤나 명확히 구분되는 어족(語族)과 즉물적(卽物的)으로 사고하는 원시사회적 특징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쪽이다. 즉, 힌두교는 주부/술부의 분리, 개념과 사실의 분리를 경험하는 언어 속에서 다양한 사실 발생의 원리를 '신'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며, 반대로 신토는 부엌에서부터 하늘까지 사사건건 그 안에서 순조로운 흐름이 발생할 수 있도록 손에 닿는(tangible) 듯이 그 원리에 의미와 인격을 부여하는 사고방식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매우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그것을 만들어 온 근간이 되는 생각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같은 제식이라고 해도 바울이 설명하는 성찬의 의미처럼 '기념'과 '기억'을 위한 것이 있는 반면, 다소 '주술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어떠한 교감 혹은 관계의 행위를 위한 제식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 기독교의 제식은 사도들의 전통을 생각했을 것이므로 주술적 의미보다는 기념의 의미가 강하다. 인도의 전통 제식이라 볼 수 있는 야즈냐(यज्ञ)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주술적 의미로 보일 수 있지만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를 지적했듯이, 고대인들에게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이 없었던 것처럼, 과거 야즈냐를 생각해 낸 사람들에게는 주술 incantation 과 기술 technology 로 나누어진 사고방식이 없었다.


인도-아리안들의 조상들은 야즈냐가 우주를 움직이도록 만드는 원리라고 생각했다. 언어가 가진 주부와 술부의 분리라는 구조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이끌어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주부에 해당하는 원리가 술부에 해당하는 현상을 만드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인도 아대륙에 정착할 시기 즈음 되면, 인도-아리안들의 입장에서 보는 선신들인 데바(Deva, देव)들이 아수라(Asura, असुर)들과 싸워 이기는 과정이며 이것이 우주에 일상적인 운행을 가져오는 원리로 보게 된다. 이러한 신들을 부르는 이름들 속에는 인도-아리안들의 문화적 배경, 이주와 그 경로 등이 담겨 있다.


고대 그리스의 관습을 생각해 볼 때,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에서 바울이 일방적인 설교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대화에 가까웠을 것이다. 서로간에 합의된 공적 공간 안에서 오랜 시간 대화를 하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을 것이다. 플루서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시대의 예배와 오늘날 교회, 성당의 예배는 담론의 방식, 메시지 공유 방식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에는 늦은 밤 바울의 강론 중 3층에서 떨어진 '유두고'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바울이 내려가 그를 치유했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단순히 당시 통신수단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거리를 두고 대화를 할 때, 친근하게 대화를 할 때, 가벼운 접촉을 나눌 때 그리고 정말 친밀한 사이에서 성관계를 나누는 다양한 층위와 느낌의 커뮤니케이션이 유효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때문에 소위 말하는 VR도 점차 이러한 느낌들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려 할 것이다.


매체의 변천과 예배행위에 대한 생각은 어느날 내가 단상의 설교자보다 대형 스크린으로 눈이 더 자주 감을 의식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과거에는 어떤 현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운영하면 레이턴시 latency 가 발생했다. 디지털 기술로 보편화된 것이기에 AD/DA 컨버팅 과정에서 약간의 시간 지연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화면과 화면의 대상이 되는 상황의 레이턴시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최근에는 과거 매우 고가의 장비로만 가능했던 이러한 지연현상의 제거가 굳이 고가의 방송장비나 녹음장비 등을 구매하지 않아도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제 아주 먼 거리를 오가는 장거리 통신이 아니라면 레이턴시 문제는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


여기에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오늘날에는 당연시 여기는 주술과 과학의 양분과 초자연, 자연과 같은 개념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 두 가지는 분립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상상력 발휘해서, 현재 우리는 온라인 상의 정보, 전파를 타고 들어오는 메시지의 진실, 사실 관계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의 생각과 반응하여 그것이 다시 현실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나는 오히려 온라인 예배라는 것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예배' 혹은 '제식'의 형식을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방식이기에 어떠한 개선을 시도하는 것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퀄리티를 높이는데 한정적이겠지만, 앞으로 중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발신자와 수신자의 교감과 반응에 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튜브로 정치나 시위 현장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에 비해 예배 메시지는 점잖다 못해 지루하다.

어찌보면 거룩한 인강(인터넷 강의)에 지나지 않는다.



식전촬영교 食前撮影敎 부흥의 시대 - 자기 만족 숭배에 빠진 사람들


나는 성찬을 '기념 행위'로 정의한다면 오늘날 '최다'의 예배행위는 식전 음식의 사진을 찍는 것이라고 본다. 이 ‘식전촬영교 食前撮影敎' 오늘날 최대 신자를 거느린 종교일 것이다. 풍요를 누리기 이전 시대는 그것을 얻을 수 있음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또한 다시 얻기 어려운 음식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여전히 지구상 대부분의 지역이 굶주림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은 자신을 기쁘게 할 순간의 만족을 증폭시키기 위해 기도를 올린다(사진을 찍는다). 다소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면 이 식전촬영교 食前撮影敎 의 부흥은 결국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고, 자신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존중을 위해 개인들을 소중히 여기는 관점이 자기만족의 함정에 빠지기 시작하면 과거 우리가 경험한 차별과 무지, 몰이해로 발생한 폭력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폭력을 발생시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위협한다. 기아와 기후변화가 왜 생겨나는지 조금만 고민해보자.


더불어 사람들이 도구에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행위가 왜 이런 방향으로 발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앞으로 종교가 살아갈 길은 점점 험난해 질 것이다. 기존의 경전을 활용하고, 대면하여 모이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매체와 도구의 변화를 무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미 당신들의 종교는 매체와 도구 그리고 기술의 수혜를 입으며 성립되었다.


나는 이 부분을 몇 종교의 메시지가 어떻게 형성되고 전승되었는지를 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적어두고자 한다.

문자의 발명, 인쇄기술이 없었다면 대부분의 종교는 퍼질 수 없었다.

전승방법이 구전인 인도-아리안들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신비주의가 만연하다.

>>>> 불교가 인도에서는 힘을 못쓰고 동아시아에서 주로 안정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오늘의 종교는 당대 최첨단 매체와 기술에 의해 콘텐츠 보존이 가능했던 것들이다.
매체의 변화와 통신기술은 분명 앞으로 우리 종교의 양상을 바꿀 것이다.
내가 굳이 '식전촬영교 食前撮影敎 부흥의 시대' 같은 말초적인 이야기를 적어 둔 까닭도
한 번 생각을 해보시라는 의도에서다.



모든 종교적 메시지들은 큰 폭의 변화를 경험했다


성스러운 메시지를 구전에서 벽화로, 벽화와 구전 병용에서 다시 구전을 글자로, 필사에서 인쇄로, 인쇄물을 다시 '녹음된 음성매체'로 옮기는 과정에서 종종 반발을 접했다. 정말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가 자신을 경배할 행위를 가르쳐 준 것이라면 왜 과거에 대한 기록은 가능케하고,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서는 제대로 일러주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을 자유의지에 대한 존중의 근거로 삼는다면, 세부 기록이 누락된 전승 때문에 자유는 커녕 불필요한 속박이 생겨나리라는 것은 초보 정치인도 아는 이야기다.


신약성서의 복음서의 성립을 보면서 잠시만 고민해 본다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들을 알 수 있다. 모든 기록은 기록자의 관점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해도 자신이 이해한 것 이상을 쓴 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은사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언에 맞는 문자 기록을 하는 사례는 거의 보고되지 않는다. 단순히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정리된 문서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때문에 모든 기록은 관점이 실린다. 이 말은 곧, 가르친 이(복음서의 경우 예수)의 메시지가 온전하게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복음서 중 성립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을 꼽는다. 연구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원 후 65~80년 경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혹은 우월론자들의 주장에 자주 빠지는 함정이 다른 종교와의 비교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매체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1) 신약성경 기록 당시 유대인 커뮤니티의 언어는 다양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은 페르시아로 끌려갔다가 해방된다. 구약의 에스더 등을 참고해보면 인도에서 이디오피아까지 다양한 지역이 포함되는데,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많은 언어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도록 만드는 부분이다. 본래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히브리어는 아람어(Aramaic Language)에 밀려났고, 유대인 커뮤니티의 실질적인 공용어는 아람어가 차지했다.


문자 기록의 일반화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계속해서 바뀐다. 이를테면, "감성적 표현”같은 정형화된 표현이 있지만 이것을 더욱 와닿게 하기 위해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바로 “#갬성 game-seong”이라는 표현이다. 딱 봐도 미국영어와 한국어의 합성어다. 한자 표기가 안되는 대신에 미국영어의 강세와 발음이 수용되어 서구 문화와 융합한 우리네 감성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문자 기록이 보편적이지 않고 통신수단이 훨씬 느렸던 과거를 돌아보면 이러한 문제는 아주 커진다.

이를테면 현재 인도에는 1,600개의 언어가 공존하고 있으며 33개의 언어가 100만명 이상에게 사용되고 있다.

국가가 헌법으로 인정하고 있는 언어도 20개가 넘는다.


매체의 문제를 정리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어는 아람어였다. 당연히 신명기 인용이 많았을 것이고, 인용을 히브리어로 했을지 아람어 번역문을 이용했을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람어가 모어라면 당연히 풀어가는 설명에는 대부분 아람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헬라어 즉, 그리스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아람어는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기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30년이 지나서 진행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복음서
아람어 전파 - 30년 지연 - 헬라어로 기록


(2) 이것은 신약성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장로 수보리(長老 須菩提, Ayusmat Subhuti)
참고로 불경의 한역은 거의 10세기 즉, 천 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우리 언어 속 상당부분이 불교 용어로 되어 있는 까닭은 이러한 교류를 통해 어휘의 증대와 발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제자들을 '장로'라 부를 때가 있다. 
장로(長老)는 본래 아유스맛(आयुष्मत्)의 번역어다. 붓다의 제자를 부르던 말이었다. 

기원전 6세기, 인도 북동부에서는 기존 소위 브라만교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사문(沙門)이라 불렀다. 브라만 계급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수행하는 이들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카필라의 왕자로 알려진 고타마 싯달타 역시 당대 관점에서 보면 사문이다.


현재는 파키스탄 신드 라르카나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henjo-Daro) 유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아리안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고대 인더스 문명이라 불리우던 이 문명은 원래 인도 아대륙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 드라비다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인도에는 지금도 1,600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했는데, 남부로 가면 드라비다어 계통의 언어들이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곳이 남부도시 첸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종의 1대 조사 달마 대사가 이 근방 출신이다.


예수의 제자인 도마가 인도에서 사망했고, 그 시신의 일부가 첸나이의 한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구약 에스더서를 통해 이미 유대인들이 인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바울이 그리스, 로마를 향해 간 것이나 도마가 인도를 향해 간 것이나 사실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도마는 갈릴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어 또한 아람어였을 것이다. 아리안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인도의 북부, 남부는 드라비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고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람어 화자인 도마가 드라비다어권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드라비다(Dravidian languages)는 어족 이름이다.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언어는 현재 사용되는 것만해도 수십개가 넘는다.


다시 불경으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연결해보면 점점 흥미로워진다.



(3) 머나먼 여정


모헨조다로 유적과 같은 고대 인더스 문명이 기원전 2,600년경 이미 성립되어 있었고, 인더스 강의 물줄기에 변화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인도-아리안들의 이주와 고대 인더스 문명의 멸망은 별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인도-아리안들의 이주는 이보다 훨씬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며, 인도 북부에 정착한 이후 그리 공격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 하라판 시대 이후,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 경이 되면 철기의 보급, 농업 생산력 등이 높아진다. 아마도 격렬한 정복전쟁보다는 말싸움이 주였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들이 정착되기 이전에도 인도-아리안들에게는 강력한 전쟁 수단이 존재했다. 이집트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바로 ‘전차’가 그것이다. 인도-아리안들의 조상은 이주가 일상인 유목민들이다.



캅카스에서 인도아대륙 북부까지


언어가 퍼져나간 경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인도-유럽어의 조상언어가 현재 도나우(다뉴브)강 인근부터 우랄산맥 인근까지 펼쳐진 넓은 평야를 돌아다니며 생활하던 유목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이들이 오늘날의 시리아 - 이란 - 파키스탄 지역을 거치며 인도의 북부 지방으로 이주해 온 경로를 찾을 수 있다. 현재 시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에 존재했던 ‘미타니’라는 왕국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도의 신들과 이름이 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조상은 ‘말(horse)’을 길들여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던 사람들이다. 전차 또한 말의 가축화와 더불어 실용화 되었을 것이다. 중국(中國)으로 잠시 넘어와서, 장자의 고사 중 윤편(輪扁)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고대인들이 살이 있는 전차 혹은 마차 바퀴를 깎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상당히 발전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그리고 말이 끄는 고속 주행이 가능한 전차를 타고 코뿔소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은 전사가 활을 쏘는 모습은 전차 기술이 없는 고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이집트, 스키타이, 인도, 중국. 이후 전술에 변화가 오고 로마제국이 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시기가 되면서 전차는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이 되기도 하지만, 인도에 정착한 인도-아리안들의 문화 속에는 아직도 전차 기술에 대한 경외감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차크라(chakra, चक्र)인데 이 단어는 본래 전차의 바퀴를 부르던 말이다. 전차바퀴 기술에 대한 경외심은 노자 도덕경 안에도 등장한다.

기술은 이처럼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준다.



기술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준다


쿠루 판샬라 문화는 현재 파키스탄 지역, 간다라라 불리던 지역 남쪽 문화로 이들의 문화가 각각 동과 서로 나뉘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심화시킨다. 베단타 즉, 베다의 마지막 부분이라 불리우며 인도철학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우파니샤드만해도 200개가 넘는 각기 다른 우파니샤드가 있고 유대인들의 탈무드처럼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다고 본다.


브라흐미 문자는 기원전 800년 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베다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1,500년 경으로 보는 것이 일만적이다. 그렇다면 베다는 어떻게 성립한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역사시대의 잘못된 정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제공한다. 베다는 구전으로 암송되어 전승되었으며 우파니샤드 역시 암송을 통해 전승되었다. 사제 계급인 브라만들은 사물과 언어를 통해 신에게 공물을 바쳤으며, 그보다 더 이전, 리시 rishi 들의 과격한 대결이 훗날 암송으로 완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번역에 따라 '머리가 깨진다’, ‘머리가 떨어진다’, ‘머리가 터진다' 등으로 조금씩 느낌이 다른데, 기본적으로 머리를 어떻게 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결론이기 때문에 암송 구전 시대 이전에는 내용의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 참수 혹은 머리를 쳐서 죽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니까야 등에서 발견되는 붓다의 경고 또한 이러한 고대 전통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마음이 고귀한 제자에게 누군가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고 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고 말한다면, 그는 머리가 터져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깟싸빠여, 나는 알기 때문에 '나는 안다'고 말하며 보기 때문에 '나는 본다'고 말한다.” <상윳타 니까야>

역사적으로 고타마 싯달타가 사용했던 언어는 마가다어 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아리안들의 이주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이미 그들의 언어도 다양하게 분할되어 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에 복음서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마가다어로 가르친 내용은 이후 팔리어로 전승된다. 더욱이 이것은 그때까지 흔했던 암송구전이라는 방식을 선택한다. 우파니샤드라는 단어의 의미가 스승 무릎에 가까이 앉는다는 의미처럼, 사람과 사람이 앉아서 운율을 만든 방식으로 구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이주해 온 아리안들의 분화된 언어라고는 하지만 분명 언어의 이름이 다를 정도로 구성요소 공유가 이미 안되는 것은 사실이었을 듯한데, 복음서가 이미 문자시대의 전승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원시, 초기불교의 경전은 복음서보다 훨씬 부정확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불교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본래 창시자가 가르친 내용을 기록한 ‘경 經’ 뿐만 아니라 후대에 경전을 만드는 단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이해를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논리, 수사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불경은 초기 불경의 고타마 싯달타라는 역사적 인물의 소박하고, 단순한 표현들에서 점점 벗어나 이후로 가면 난해하고, 장황한 표현들도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라는 것이 점점 정치적 수단이 되고, 세력이 커져가면서 스탠다드를 정해 장악해야 하는 과정을 겪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당시까지 고타마 싯달타가 당연히 썼을 법한 표현들이 단절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싯달타가 인도-아리안들의 신비주의적 관점을 수용했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출가 후 만났던 스승들을 떠나 스스로 깨달음에 닿은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경
마가다어 전파 - 팔리어 암송 전승 - 산스크리트어 기록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본 자체가 이렇게 많이 지연되고, 번역된 기록인데

'사실검증' 측면에서 신뢰가 가능할까?

때문에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매체가 아닌 맥락,

내용이 아닌 발신자의 아이덴티티 이해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 인간에게 굉장히 엄청나게 많이 어렵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전 이해가 어렵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이비, 유사 종교가 등장하는 까닭도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3) 문자를 인쇄하다


재미있는 것은 불경도 소위 ‘고급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하도록 한 시대가 있었고, 성경도 ‘라틴어’로 기록하도록 강제한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인도-유럽어권으로 사고방식이 비슷하니 하는 짓도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쇄술이 사용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루터와 같은 개혁가들이 성경을 번역해 인쇄해 보급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구텐베르그 인쇄술은 오늘날 지식혁명의 상징과 같은 아이콘이 되었고, 1611년 번역된 영국의 킹 제임스 성경(KJV)은 소위 ‘표준영어’ 정착에 큰 공을 세운다. 이제 언어가 분화가 아닌 성숙할 수 있는 시점을 맞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양피지에 기록했기 때문에 그것이 정확한 전달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당대의 방식은 여전히 구전전파였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도, 옮겨 적을 사람도 없었다. 당시 글을 적기 위해서는 값비싼 재료들이 필요했고, 오늘날처럼 글쓰기 양식이 잘 정리된 시대도 아니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자 기록에 사용되는 띄어쓰기, 문장 구조 등은 지극히 최근에 확립된 것들이다. 극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어려웠다.


더군다나 사도들의 서신들이 경전으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은 더욱 험난했을 것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중요한 인생 상담을 해주기 위한 이메일을 보냈을 때 훗날 그것이 책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본다면 조금 감이 잡힐까? 더군다나 기록하기도, 전달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던 시대에 말이다. 기록물의 가치가 높던 시대였기 때문에 보관에 신경썼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활자매체가 다양하게 퍼져나가고 지식과 정보의 전달과 보존이 훨씬 명확해졌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개인차는 여전히 크다. 종이를 만들어 낸 중국에서도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한나라가 경전 복원을 하기 위한 작업 중 일어났다는 금고문(今古文) 논쟁 또한 문서비평의 일종으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출처를 통한 재구성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현시점에서 접하는 고대 종교의 가르침은 처음 그것이 말해진 순간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어 기록된 복음서, 마가다어에서 팔리어로 전승되어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불경. 이미 형성 단계에서 번역과 재구성을 거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때문에

정보 그 자체보다는

형성과정과 맥락 전체에 대한 이해가

진리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4) 빛의 속도로 전송되는 정보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의 운집이 바이러스 감염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우려를 맞이한 이 시점에 집회형식의 예배를 대신하여 소위 ‘온라인’ 방식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곳이 많아졌다. ‘매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고대에 있었던 경전의 전승보다 훨씬 정확하고 빠른 정보의 전달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온라인 ‘예배’가 성립 가능한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실 이전부터 현장에 있어도 사람들은 설교자의 얼굴이 아닌 화면에 떠오르는 상을 본다. 사진이론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 정말 복잡한 상황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디지털 콘솔과 디지털 전송 장치를 거친 소리가 귀에 닿고, 눈에 보인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AD/DA 컨버터를 거친 ‘가상현실’이다. 같은 현장이 그것을 상쇄하는가?


오히려 사람들은 내가 휴일 아침에 지친 몸을 이끌고 현장에 가는 행위, 사람들을 만나는 그 행위에서 더 많은 반응을 얻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예배당, 법당, 모스크 안에 울려퍼지는 소리는 전기신호, 전자의 움직임을 다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게 번역한 것이다. 대형 교회 출석을 위해 주차장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출차하며 스트레스 받고, 예배 직후 짜증을 내며 점심을 먹는 행위를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은 아닌가?


나는 오늘날의 종교들이 선택하는 집회의 방식 자체가

원래 그 종교를 가르치기에 적합한 방식인가에 대한 고민이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본 자체가 이렇게 많이 지연되고, 번역된 기록인데

'사실검증' 측면에서 신뢰가 가능할까?

때문에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매체가 아닌 맥락,

내용이 아닌 발신자의 아이덴티티 이해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 인간에게 굉장히 엄청나게 많이 어렵다.

정보 그 자체보다는

형성과정과 맥락 전체에 대한 이해가

진리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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