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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제 전시의 주제 작품인 동시에 연작 전체의 제목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저는 작품 전반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 모두가 ‘상호작용’이라는 보편질서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몸이 있을 때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 자신을 확립하는 기준이 되어 줍니다. 어떤 것이 따로 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함께 일어난다는 관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다른 두 작품을 보셨다면 이 작품이 해질녘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는 서해바다의 수면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보고 계신 작품은 가운데에 11분 7초의 노출, 바깥쪽은 66분의 노출로 촬영된 사진 두 장을 겹쳐 둔 것입니다.
우리 동아시아의 언어들은 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불경 번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언어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말 표현 속 상당부분은 불교용어와 그 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말 ‘찰나’는 산스크리트어 크사나에서 온 것입니다. 아비다르마 불교에서 시작된 ‘순간성’ 개념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찰나는 현대의 시간 기준으로 보면 약 1/75초 정도되는 짧은 순간입니다. 이것은 한 생각이 마음 속에 머물고 사라지는 시간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11분 7초 정도가 되면 5만 찰나가 되는데, 우리말 ‘오만가지 생각’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작품 속 안쪽 사각형은 11분 7초 (667초) 노출의 사진입니다. 이것이 ‘오만가지 생각’을 상징합니다. 우리 마음의 상태인 것이죠.
바깥 쪽 사각형은 66분(3960초) 노출 사진입니다. 역시 해질녘 서해바다의 수면을 촬영 찰영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 수비학에서 7은 완전수를 6은 불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표시로 6을 세번 반복하는 666이 등장하는 것이 이런 원리인데, 6이라는 불완전수를 3이라는 완전수적 표현으로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마음을 상징하는 11분 7초 노출과 불완전을 의미하는 66분 노출을 겹쳐 인간의 마음과 인식의 불완전성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이 작품의 의도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동영상 아래의 글을 통해 전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름과 형색을 소멸하고 지각대상과 형색에 대한 관념들을 남김없이 소멸할 때, 그때 뒤엉킴이 풀린다네" <상윳따 니까야>, 이중표 譯
작가노트
귀류법(歸謬法) - 고대 인도의 논리학: '프라상가 prāsṅga' 논법이라고 부른다. 상대의 주장, 반대하고 있는 개념을 진리로 간주한 다음 그것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면 사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나의 주제 작품 '4번과 6번 노출 <오만가지 생각>'은 '귀류법적 표현'이며 그 시각화다.
"조르주 뒤메질(George Dumézil)의 기능주의에 의한 사회적 환원 방법에 따르면, "신화, 의식 혹은 상징은 그 어원을 밝히자마자 곧바로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원 분석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인도 불교와 자이나교> (김미숙)
이 작품은 교에서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 하듯이 개념화의 증대와 그것을 실체화한 논의들은 적절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다.
오만가지 생각의 주기 11분 7초의 도입은 '마음'과 '찰나'의 긍정이 아니라 그것이 부적절함에 대한 것이다.
고대근동 수비학의 66이라는 상징수를 이용한 것 또한 '불완전성' 즉, 개념화 증대와 그것의 실체화는 결국 '오해'임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근동 수비학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경우 우주론을 그려 나갈 때 그것들을 기능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현상의 인과는 자연법칙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권리에서 비롯된다는 사고방식이 저변에 깔려있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논하며 자연/초자연의 이분법적 설명을 하는 것에 대한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의 비판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신(神)’이 가리키는 ‘야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는 자연과 초자연이 구분되는 세상이 아니라 자연의 인과법칙 자체를 야훼의 권능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세계다.
고대 근동인들에게 세계는 신들의 활동이었다. 고대 수메르인들과 이집트인들은 정교한 달력을 만들어 냈고, 태음력과 같은 계산법을 통해 1년을 계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러한 나타남의 근간은 신들의 활동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천체는 물론 날짜들에도 신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6의 문제 = 7은 왜 많은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가?
7은 고대 수메르 시대에서부터 상징적인 숫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매우 신비로운 숫자였다. 고대 수메르는 60진법을 사용했던 문명으로, 60은 12개의 숫자를 인수로 갖는다.
재미있게도 1, 2, 3, 4, 5, 6까지 연속되다가 10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수메르인들에게 7은 기묘한 숫자였고, 기원전 26세기경부터는 7의 신비화가 반영된 문헌들이 발견된다.
수메르 시대부터 7을 신비로운 숫자로 여긴 탓인지 이러한 접근 방법은 다양한 고대근동 문헌에 등장하며, 창세기에서는 6일째까지는 창조를 7일이 되면 휴식이 등장한다. 이집트의 수비학에서 7은 완벽함 혹은 어떠한 주기의 완성을 의미했고 시대가 흐르며 7은 고대 근동 문명 전반에서 점차 신성과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이러한 수비문학적 전통에서 6을 불완전수로 사용하는 용례가 많이 등장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의 첫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6개의 유대인 정결의식에 사용되는 항아리’가 등장한다. 상징적으로 이해해보면, 물로 씻는 유대인 정결의식의 불완전성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성이 대신하게 될 것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문화들에서 7은 특별하게 다루어진다. 행운의 7과 같은 생각은 물론, 일본에서도 칠복신(七福神, しちふくじん)이라 하여 각 분야별로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들에 대한 이해가 있다. 60의 인수가 아니라는 점, 소수라는 점, 닭의 부화에 걸리는 시간 등에서 사람들은 7을 특별한 숫자로 여겼다.
또한 완전수적 인식, 날짜 계수의 보편화 등이 자리 잡은 후에는 완전수 상징인 7과 40을 곱하면 인간의 임신기간이 나온다고 믿었다.
나는 66을 불완전수의 상징으로 작품에 적용했다. 이것을 인도 문명에서 동아시아로 전해진 ‘찰나’와 ‘오만가지 생각’을 감싸는 형식으로 표현하여 인간의 마음, 인간의 인식이 갖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시 작품을 맺는다.
찰나와 오만가지 생각
무아(無我)를 역사적 맥락에서 독립시켜 불교만의 사고방식으로 바라보게 되면 오늘날 흔히 일어나는 문제처럼 매우 신비주의적이 되거나 잘 해야 선정(禪定)적 접근이 가능할 뿐이다. 이는 번역어와 번역사를 고려하지 않은데에서 비롯된 단순화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동아시아 문명의 경우 유위(有爲) 혹은 무위(無爲)와 같은 번역어를 노자의 사상과 연결하는 경향을 보인다. 분명 유사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격의불교를 통해 '해석되며 수용된' 불교가 동아시아에 오랜 세월 정착이 가능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도-아리안 언어 전통에서 보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노자와 중국의 사상에서 바라보는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아(我)의 이해도 이러한 맥락이다.
야즈냐 - 베딕 - Post 베딕으로 이어지고 전해지는 생각의 근간을 놓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아(我)'는 동아시아 언어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에 그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다.
무아(無我)의 논의는 '내가 없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간을 외부세계 혹은 현상과 본질을 불연속적으로 나누지 않는데 중점이 있다. 왜냐하면, 인도-아리안 문화를 한역할 때 사용하는 '아(我)'는 기본적으로 나를 가리키는 인칭대명사가 아니라 '아트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찰나'의 문제도 이러한 맥락이다.
인도-아리안 문명에서는 존재론적 본질을 상정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언어의 구조적 특징 중 하나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것은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문명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북유럽 신화, 그리스 철학, 인도-아리안 문화가 이러한 경향들을 강하게 보여준다.
찰나는 기본적으로 '마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호작용, 상호인과(mutual causality)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본질' 혹은 '독자성'을 기반으로 접근하게 되기에 생긴 문제다. 무상(無常)함이란 그것을 어떠한 허무함으로 보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려는 관점이 아니라 그것이 항구적이거나 영원하다거나 하는 어떠한 '추이'를 배제하고 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찰나는 불교의 초기 승단에서 "한 생각이 생겨나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시간을 설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아비다르마와 같은 초기 승단의 학자들은 한 찰나 क्षण Kṣaṇa 에 생각이 생겨나고 उत्पाद Utpāda 사라진다 भङ्ग Bhaṅga 고 보았다.
120의 찰나를 1달찰나(一怛刹那, 약 1.6초), 60달 찰나를 1납박(一臘縛, 약 96초), 30납박을 1모호율다(一牟呼栗多, 약 48분), 30모호율다는 1주야(一晝夜, 24시간), 따라서, 1찰나(刹那 क्षण Kṣaṇa)는 1/75초가 된다.
티벳 불교에서는 1찰나(刹那 क्षण Kṣaṇa)를 약 0.0001초 (손가락을 튕기는 시간의 1/360)로 정의한다(2005년 8월 Geshe Thupten Kunkhen, <불교와 양자역학> Vic Mansfield에서 재인용)
나는 '찰나'라는 인식은 존재론적 사고관념의 근간, 불연속적 이분법의 관점에서 '무상함'을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실상은 초기경전에 대한 부적절한 해석 방법이라고 보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무상함을 순간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떤 근본요소의 상정 시도이며 이는 불교의 기본적인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고대근동의 수비학과 이러한 해석학적 오류를 중심 개념으로 우리의 마음, 인식, 생각의 불완전성을 표현하는 것을 고민해 본 것이다. 고대 근동인들이 세계를 신들의 활동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나, 그리스인들이 세계를 본질의 그림자로 본 것이나, 인도-아리안들의 아트만과 브라흐만 인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나와 세계의 분리 경향이. 다른 하나는 현상과 본질의 분리 경향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관점, 우주의 근원과 개체적 본질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연속적 이분법에 의한 상정이다. 하나라는 인식 혹은 개체성의 인식 모두가 이러한 '구분'에서 일어난다. 무시간적 존재가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그것인 사실이 아닌 '개념'인 것이다.
나의 작품 그리고 이번 전시는 그러한 생각과는 많이 다른 생각에서 출발한다. 다소 자극적으로 표현하면 플라톤의 발상과 반대다. 나는 그가 말한 이데아 혹은 본질적인, 불변하는 영원한 세계를 환상으로 본다.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가 실체다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은 세상을 무시간적으로 바라보는 경향 때문이다. 나는 '시간'의 실체를 규명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시 개념화의 증대를 불러온다. '변화의 추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가 엔트로피 이행을 통해 시간의 실체에 접근을 시도했듯이 우리 우주 전체가 현재의 상태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은 변화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이라는 것은 변하는 것을 의미하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개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 즉, 언어적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이해는 인류라는 종의 생존 가능성을 극대화시켜준 생존기술에서 비롯되었다.
"희론적멸(戱論寂滅)"
가츠라 쇼류의 글에서 '희론'의 원어를 번역한 표현은 '언어적 다원성'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간결한 정의를 내릴 때 자주 등장하는 일종의 오류에 관한 것이다. 불교를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진 표현의 번역어 '中'은 오랜 세월과 선정의 신비화를 지나며 다시 신화적 서사를 덧입었다. '空'과 '中'에는 신비가 없다. 그것은 개념화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며, 유럽인들이 20세기에 시작한 '해체'를 2천년 가량 먼저 시도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 실재론적 주장이나 개념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일 실체화하여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개념화를 통한 실체화의 끝에는 적절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감관을 초월한 순수이성적 세계에 대한 열망은 계속해서 인간에게 해결할 수 없는 갈망이 될 뿐이다.
사실과 개념을 분리하는 능력을 근간으로 하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감관을 중심으로 소통하는 과정 안에서 우리 자신이 변화해 온 기나긴 과정과 상호작용의 원리를 이해해 나갈 때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넓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다지 심오할 것도 그렇다고 허무할 것도 없다.
모든 개체는 존립을 위해 전우주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목적론적으로 왜곡하지 않아야 가슴 깊이 새겨진다.
흙에서 와서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고,
전우주를 마음 속에 그려보고, 그 나름대로 이해하며 살아간다.
얼마나 신기한가?
사진전 <응시> - 전시를 열며 또한 마치며
사진작가 방영문
bhang@musewsho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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