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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사진연작 <순야타 suññatā, 空>, 2021



순야타(suññatā, 空)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空'의 빠알리어 원어다.

'空'은 산스크리트어 Śūnyatā (Dev: शून्यता = शून्य (śūnya, “zero, nothing”) +‎ -ता (-tā, generalizing suffix)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경의 산스크리트어 번역과 결집이 알려진대로 인도의 '쿠샨왕조' 시기의 일이라면, 그보다 조금 더 이전에 붓다의 말씀을 먼저 보존한 언어는 '빠알리어'다.


붓다의 모어(母語)는 '마가다어'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대화들은 빠알리어로 전승되며 보존되다가

훗날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어 전해진다.


<순야타 suññatā, 空>, 2021 (c) 방영문
<순야타 suññatā, 空>, 2021 (c) 방영문

물 그리고 空


현현하는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듯이 발현되는 의식 또한 계속해서 '출렁인다.'

나는 이 공(空, suññatā)의 표현을 위해서 '물'을 수단으로 삼았다. 사실 이전부터 '물'은 내게 매우 중요한 소재다. 바다가 나에게 인식되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물이라면, 수조에 담긴 물은 인식주관인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나는 우리의 인식과 소위 '정신'으로 표현되는 어떠한 활동을 이야기할 때, 혹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自我)라고 생각되는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은 그릇에 담긴 물을 이미지로 떠올릴 때가 많았다. 이것은 일정하지 않으며 그 안에는 어느 정도의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릇은 여러가지 이유로 흔들린다. 그릇이 깨어지면 물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천천히 증발할 것이다. 되돌아 갈 방법은 사실 없다. 나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내가 바라보는 인간의 의식 - 정신, 인식, 관련 작용 - 을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한다.


<순야타 suññatā, 空>는 지난 7월 20일부터 8월 26일까지 '갤러리 시소'에서 개인전으로 발표했던 사진연작 <응시 Contemplative Contemplation 凝視>의 확장판이다. 응시가 능동태적인 표현을 위한 것이었다면, 순야타는 오히려 밖에서 안으로의 관조(觀照 contemplation)를 성립시킨다. 이 또한 다시 '응시 contemplative contemplation'라는 행위로 정리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인식이 유지되는 짧은 시간(수십년) 혹은 문명사적 시간을 도입해 볼 수 있는 4만년 가량의 시간을 대입하는 정도에서는 가능한 질문이지만, 만일 이 시간을 천문학적 기준인 수억 혹은 수십억년의 시간을 대입하게 된다면 과연 '인간'이라는 종(種,species), 그것에 대해 존재론적 의문을 던지는 것이 타당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존재론적 질문은 '이렇게 와서 저렇게 가는' 현상이 된다.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라 정의할 수 있는 종 자체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최근 발견을 토대로 보면 약 30만년 가량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타당성은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가능함을 알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것이 타당한 질문이 될 것이다.



현현하는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듯, 발현되는 의식 또한 계속해서 출렁인다. 끊임없는 세계 즉, 계속해서 변화하는 우주의 양상을 우리는 시간으로 이해하며, 계속해서 출렁이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정신작용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잔잔한 물 위로 달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듯이 출렁이는 의식이 고요할 때 지저분한 것들이 가라앉고, 하늘의 달은 물 위에 있는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물 위에 비친다.



一切는 十二入處


붓다가 세상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으로 <잡아함경>에 등장하는 '一切는 十二入處'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인식되는 세계와 인식주관인 나의 반응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우리 인간에게는 세계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인식 외의 방법으로 세상을 인식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인식의 확장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냈으며, 수많은 외부 장치들을 개발해 6근(六根)의 확장과 정교화를 성공시켰다. 기본적으로 갖추어진 감관으로 보고, 듣고, 냄새를 느끼고, 맛을 느끼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그것을 분석하는 도구들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를 알게 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根, 境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觸의 세계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


우리는 고정불변하는 '관념'을 사실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세상에 대한 매우 왜곡된 인식을 가져왔다. 이것은 앞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오랜 기간 주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관념, 개념을 현실과 혼동하여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인류의 문제로 다가온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몰입하며 자신은 물론 소중한 타인과의 관계 또한 망가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응시>에 이어 고요함이랄까, 평정이랄까 하는 것을 중요한 상태로 제시하지만 <순야타 suññatā, 空>의 표현 또한 잔잔한 물 위로 달이 비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복잡한 움직임들이야 말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표현들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가야할 방향은 고요함의 추구이며, 그를 통해서 세상을 가능한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나는 <순야타 suññatā, 空>를 중요한 이정표적 관점으로 제시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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