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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관념의 덧칠을 벗기는 과정은 결국 나의 인식의 낡은 껍데기를 벗는 과정

인도 고대 경전인 베다(Veda, वेद = knowledge)에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뒤따르는 6개의 분과 학문이 있다.


  1. Shiksha(शिक्षा) = phonetics

  2. Chandas (छन्दस्) = prosody(=metrics, versification)

  3. Vyākaraṇa (याकरण) = grammar

  4. Nirukta (निरुक्त) = etymology

  5. Kalpa (कल्प) = ritual instructions

  6. Jyotisha (योतिष) = astrology

고유의 글자와 언어를 가진 우리는 문자와 언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역사' 그리고 '자료'라고 하면 문자와 반드시 연결지워 생각하게 되는데, 이러한 접근이 우리의 역사인식과 수용의 지평의 폭을 사정없이 좁혀버려 보편사적 이해가 아닌 '특수사례들'만을 받아들이고 살게 되는 상황으로 몰고가게 된다. 베다는 기원전 1,500년 경에는 이미 전반적인 내용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브라흐미 문자 계통인 데바나가리 문자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활용된 증거가 남아 있어 기원전 6세기 경에는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는데, 인도에서 확인되는 공식적인 사용은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 비문이다. 그러니까 기원전 15세기에 이미 틀이 잡혀있는 경전을 전승하는 방법은 문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짧게는 수십년 안에도 언어는 굉장히 큰 변화를 겪는다. 우리 영상물들을 봐도 불과 2, 30년 전의 인터뷰 자료 등에서 느껴지는 어감, 억양이 지금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록물 즉, 이러한 경전을 전해주기 위해서는 주요한 규칙들을 확실하게 정해두고 가야 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베다를 배우기 위해서는 음성학, 운율, 문법, 어원론을 알고 있어야 했고, 사제가 되어서 행해야 하는 제식과 제식의 시점을 특정하기 위한 천문에 관한 내용을 알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계몽한 자로 여겨 타인의 몽매함을 탓하는 것은 결국 어리석은 자의 무지에 불과하며 그 옛날 베다 Veda 를 구성했던 리시 rishi 들의 잔혹한 검증 과정처럼 알지 못하고 말하는 자는 머리를 쳐서 죽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3,000여년 전에는 사람의 머리를 쳐서 죽였다면, 이제는 몽매함에서 깨어날 수 없다는 죽음(मृत) 속에서 자신의 머리가 떨어졌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그 형벌이 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볼 때 '죽음을 피한다'는 의미의 감로(甘露 - अमृत)란 이치에 맞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원리와 균형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실존적 한계에 대한 이해와 인정, 그리고 거기에서 영영 닿을 수 없는 불가지(不可知 inscrutability)의 영역이 존재함을 겸손하게 수용함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될 수 있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지혜와 지혜가 아닌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아는 사람, 그는 지혜가 아닌 것으로 죽음을 넘어서고, 지혜로 불사를 얻는다"고 했다. 우리는 어떠한 '긍정적 표현으로 기술되는 상태'를 좋은 것, 청명한 것 혹은 아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여기서는 '지혜가 아닌 것'도 알아야 함을 알려준다. 베다는 왜 6개의 부속분과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것들을 연구하도록 만들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알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바로 '제대로 알기 위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알기 위해서는 생각이 담긴 '말'이라는 몸을 가져야 했고, 그 몸을 자세히 관찰하며 이해하기 위한 이해력을 갖추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베다를 만든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이 아닐까 한다. 노래 속에 깃든 신을 알지 못하고 노래하면 머리가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는 바로 '앎'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라는 매우 오래된 경고이며,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생각할 수 없는 상태, 머리가 떨어진 상태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보려는 노력보다는 흐릿하고, 멍하고, 답답한 것을 적당한 신비적 색채로 덧칠하여 사람들에게 한순간의 환각제만을 투여하여 '망각'이라는 수단으로 삶의 비참함을 잠시 피해가라는 유혹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우리는 잠시 그러한 '털어버리려는 행동'을 중단하고 가만히 서서(혹은 앉아서, 아니 누워도 좋겠다) 다른 것을 멈춘채 가만히 응시하며 생각에 잠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위해서는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생각의 도구들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다양한 생각들의 기원 origin 즉, 출발점에 가보면 그것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원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출발해 이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수메르의 우르크로 가는 <관념의 모험 Adventures of ideas>을 즐기고 있다.


"이처럼 마음이 고귀한 제자에게 누군가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고 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고 말한다면, 그는 머리가 터져 버릴지 모른다." - 고타마 싯달타 the 붓다 <#상윳타_니까야>


<2019 인천동아시아 사진미디어 페스티벌 대표작가전 초청작, 사진연작 '응시'(2019) 중>


언어의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다

언어는 수십년 안에도 굉장히 큰 변화를 겪는다. 시간과 공간을 거치면서 의미도 변화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활영어를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겪게되는 어려움의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교과서나 교재 등을 통해서 배운 영어가 해외에서 소위 '안통한다'라는 식의 팁을 자주 받게 된다. 나는 사실 교육콘텐츠, 프로그램 판매를 위한 다소 과격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교과서적으로 배운 수많은 표현들이 현재 미국에 가서 사용할 경우 상황상 적절하지 못한 것이 자주 있다.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I'm fine"과 같은 패턴은 사실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차라리 "How're you doin?"/" "Yah, good~ great~, sup ma friend?"/ "Great~ wanna get somethin?" 같은 패턴이 더 흔할 것이다. 사실 언어표현은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선택사항이다. 맞고 틀리고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소위 '격식을 차린 다소 정적인 이미지의 인물'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면 교과서에서 배운 '정석'은 피하는 것이 좋다. 한마디로 한물간 표현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표현의 형성이 어떠한 이유에서 가능했는지를 모르면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현재의 한국어에서 "톡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카카오톡이라는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격식없이 메시지를 보내라는 것이다. 만일 15년전,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그 사람의 어깨나 손등을 '톡'치지 않을까? 불과 20년도 안되어서 언어 표현들이 굉장히 많이 변했다. 또한 수용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오래전 옛날이라면 거리가 먼 공간의 서로 다른 언어가 뒤섞이는 경우는 적었을 것이고, 인접 지역간 동일 어족, 유사한 언어들이 뒤섞이는 경향이 많았을 것이다. 영어 어원의 'house'와 불어 어원을 갖는 'mansion'이 갖는 일반적인 이미저리 imagery 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거 불어 쪽 화자들이 영어 쪽 화자들을 지배했던 것이 원인임을 알게 되면 금방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우리말 안에도 근현대 서양에서 시작된 표현들에 대한 번역어들이 일본어를 통해 들어온 것이 많다. 최근에는 미국영어와 우리말의 혼합도 자주 보이는데, 이를테면 자주 사용하는 "갬성"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우리말 감성(感性)은 emotion 으로 쉽게 번역이 될 것인데, 감(感)이라는 글자는 무언가에 인접하여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미국영어의 모음발음과 섞여 "갬"으로 발음하는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감성"이라고 발음할 때와 "갬성"이라고 발음할 때의 억양을 들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이처럼 인간이 가진 인식의 틀이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도 변한다면 그 변화를 역추적해서 그것의 원래 의미에 가깝게 가는 작업은 고되지만 매우 재미있고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나는 언어의 변화를 긍정하며, 다양한 언어간의 교류를 통해 사고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언어의 특징을 통해 사람들의 문화와 생각에 관한 이해도 깊어질 수 있다. 내가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이것이다. 바로 대상에 가해지는 신화적 채색이다. 나는 이것을 오늘날 인도에서 자주 발견한다. 언어적으로는 그레꼬로만 문화와 그 뿌리가 같은 사람들로, 이들 인도-유럽어는 오늘날의 캅카스 북쪽, 좁게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넓게는 다뉴브 강부터 우랄산맥에 이르는 넓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살던 사람들의 이주가 만들어 낸 문화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그레꼬로만 문화의 뿌리가 되는 애게해 크레타섬에서 분화했고, 더 오래 전에는 아나톨리아 반도,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더 멀리 이주하면 우리에게 생소한 아나파시보오손 같이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문화를 찾을 수 있지만, 역시나 강하게 남아있는 것들은 페르시아 그리고 오늘날에도 매우 독특한 인도의 문화가 있다. 이들의 조상들은 유목민들이었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문화 속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는데 바로 '소'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수메르에서부터 전례된다고 보고 있는 <길가메시>의 이야기에서도 신들이 하늘의 황소를 보내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히브리어의 첫 글자 '알레프'는 '소'의 상형에서 비롯되었더는 견해가 있다. 또한, 코카서스 지역의 유목민 사회에서도 '소'와 '형제들'에 관한 신화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소'는 매우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고, 가장 가치있는 사유재산 중 하나였으며, 유목민 사회란 힘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빼앗고, 지켜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남성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고 그와 관련된 윤리의식이 형성된다. 사실 아힘사와 카르마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주 쉽게 이해된다. 내가 다른 부족을 공격하면 그대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내용들은 신화적 채색으로 본래의 색깔이 사라진다. 베다시대 제식에서 하는 사제의 행동을 가리키던 '카르마'는 1,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의 윤리의식을 다루는 논리 속으로 들어와 우주의 법칙과 같은 자리를 차지했고, '아힘사' 역시 윤회적 세계관과 융합되면서 기묘한 논리로 발전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늘 내가 먹은 삼겹살이 전생에 돼지였던 나를 잡아먹은 어떤 인간 혹은 다른 동물의 카르마에서 비롯된 상황으로, 현생의 내가 불판을 달궈놓고 전생에 나를 잡아먹고 돼지로 태어난 어떤 돼지를 먹은 것이라 해도, 우리가 서로 그 이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해고, 다시 윤회를 하며 언젠가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어 만나고 헤어질 것인데 과연 누가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이며, 누가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인가?


이것 - 카르마와 아힘사 그리고 윤회의 도덕적 압력 moral pressure 이라는 기능 - 은 애초에 매우 억지스러운 논리다. 그러다보니 체계가 복잡해지고 점차 풀 수 없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이 되어 버렸다. 한가닥 한가닥 잡고 풀어내다보면 결국 혼자 앉아 피식 웃고 말게 될, 별거 아닌 이야기다.

네트워크 - 힘의 근원

개체적 특징이 아니라 연결과 반응에 의해 정말 강력한 힘이 나온다. 오늘날의 뇌 연구를 보자. 인간이 가진 지구상 생물체 중 가장 독보적인 뇌 기능은 단지 뇌의 크기나 세포 밀도 뿐만 아니라 부위별 네트워크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많다. 연합영역과 영장류 뇌의 유사한 영역을 비교했을 때는 사람의 뇌 영역이 예상보다 몇 배 더 크다. 언어기능 또한 특정한 부분보다는 네트워크에 의한 작용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추세다. 점차 연구 자체가 뇌 기능의 발달, 고등한 사고능력이 점차 복잡한 사회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함께 발달했다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즉, 지능의 본질이란 개체, 개개인 속에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반응과 입출력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유아기 인간사회 속에서 자라지 못한 인간은 평균적 지능을 획득할 수 없다. 야생에서 자라다 발견된 인간이 인간 사회로 편입하지 못한다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출생 후 초기 뇌발달 과정에서 인간사회 속에서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으면 해부학적 특징이 인간인 것과 별개로 소위 말하는 '평균지능'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2019 인천동아시아 사진미디어 페스티벌 대표작가전 초청작, 사진연작 '응시'(2019) 중>

현생 인류의 실존적 한계 상황

나는 대학시절 화이트헤드 Alfred N. Whitehead 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는 표현으로부터 이후의 생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무언가를 놓고 생각할 때 그것이 구체적인 대상이 아닌 단순히 개념인 경우가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사실이 아닌 추상인 것이다. 불교적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면 나의 마음이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나의 현실이란 결국 나의 인식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은 현재 우리의 실존적 한계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만 년 전, 소위 현생인류라 불리우는, 다양한 의식활동의 결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의 단계에서 아직까지 눈에 보일만큼 큰 차이가 발생하지 않은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소프트웨어는 매우 빠른 속도로 업그레이드하고 있으나 하드웨어의 사양은 거의 그대로이기에 시스템의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직관적 인터페이스와 흔히 말하는 문제의 '본질'을 들춰내기보다는 생존본능과 같은 반응과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뒤늦게 논리를 취한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 도약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사실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철학자들이 수도 없이 시도했던 행위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헬레니즘 이전, 고대 그리스 철학의 부흥기를 불러왔던 불씨를 찾아 관념의 군더더기들을 벗겨내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맞추어 고대 그리스로 갔지만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내가 필요한 것들을 주워담을 뿐이다.



결국 나의 작품 구상은 채색과 껍질을 벗겨보는 과정


말하자면, 20세기 초중반,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이야기했던 '탈신화화'( Entmythologisierung, 脫神話化)처럼, 자연과 초자연 같은 이분화가 없던 시절의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반응체계'의 획득 같은 것이다. 단순히 관조하는 명상적 태도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다. 이미 인간이 도달한 자연 이해의 수준은 인간의 오감으로는 관측이 불가능하고, 일상언어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의 관념도 마찬가지다. 혼자 세상과 거리를 두고 생각에 잠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동이고, 가치있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는 조직화 organization 와 최적화 optimization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정보의 획득 즉, 배움의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혼자만의 세상 속에 있다보면 정작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모르는 정말 무지몽매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지구 반대편 사람과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마트폰을 꺼내 그 사람의 아이디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인류가 자기 초월에 관심을 둔 지난 수 천 년을 보내는 동안에도 순수하게 정신력과 집중력 만으로 장거리 통신을 하는 텔레파시 같은 능력은 개발되지 않았다. 아니, 혹여 특정한 누군가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런 특수한 능력을 획득한 사람들이 자비와 겸손이라는 미덕을 갖추면 좋겠건만, 대부분은 성취에 심취하여 자기몰입에 빠져 이상한 길로 들어선다. 대부분 말로가 좋지 않다. 그럴 바에는 힘들여 텔레파시를 개발하지 말고 가까운 통신사 대리점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스마트폰을 구입해 즐겁게 생활하는게 훨씬 좋은 삶이 될 것이다.


덧칠을 벗기는 과정은 결국 나의 인식의 낡은 껍데기를 벗는 과정

이처럼, 관념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를 편안한 마음의 상태로 이끈다. 나는 편안한 마음의 상태로 살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라 믿는다. 그것을 위해 많은 것들이 개발되었고, 많은 지혜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반대로 그것들을 사용하고, 배워가는 과정에서 개념의 증대, 고단함이 늘어나고 되려 삶의 짐이 되어간다. 종교생활자들이 부도덕한 자신의 내면과 그와는 이질적인 사회적 페르소나를 쓰고 괴로워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덧칠된 것들 천천히 벗겨내어 본래의 색과 질감 그리고 모습을 되찾는 과정을 한걸음씩 밟아보는 것도 의미를 찾아가는, 아주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나는 최근 이러한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함께 천천히 생각하는 과정 속에서 최종적으로는 한순간이나마 마음의 더 없는 편안한 순간을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과정이 가져다 준 의미는 각자에게 새로운 의미가 되어주며 더욱 빈번하게 편안함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바람이며 또한 믿음이다.

<2019 인천동아시아 사진미디어 페스티벌 대표작가전 초청작, 사진연작 '응시'(2019) 중>



맺으며


이렇게 나는 2019년에 기회를 얻어 발표했던 사진연작 <응시>의 '본작'을 구상하고 있다. 사진이지만 순간보다는 침묵의 시간을, 기록보다는 표현에 중점을 그리고 함께 생각하는 과정의 공유가 가능하길 바란다. <응시>는 다른 말로 <침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두 개의 제목을 놓고 몇 장의 사진들을 묶어 두었고, 이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그간 달라진, 내 낡은 인식의 껍데기를 벗은 새로운 연작으로 표현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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