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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The Embodiment - 초상사진(肖像寫眞, portrait photography) 프로세스의 작품화

<The Embodiment - the process of some cases of portrait photography works>


2020년 11월 6일에 적어보는 작업 노트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Intrinsic nature and extrinsic nature,

existent and nonexistent —

who see these do not see.


만일 '있는 것'이나 '없는 것',

'자성 - 본질적인 것' 혹은 '타성 - 비본질적인 것'을 본다고 하는 자는

보는 것이 아니다.


- Nāgārjuna



 

<2020-11-04 테스트 촬영>


 

존재와 본질의 세계에서


생각의 전환점은 지난 2018년으로 돌아간다. 이화여대에서 1달 기간 프로그램 촬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입자물리학과 관련한 세계 학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정과 맞물리면서 정말 평생에 한 번 갖기 쉽지 않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사진이 카메라에 담겼다.


나는 당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불교의 유식(唯識) 사상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색의 최소를 하나의 극미 極微 라고 한다.

>>> 사물을 분석하면 하나의 극미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극미가 색의 최소이다.

물질을 분석하여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색의 최소 단위로서의

극미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최소 단위로서의 극미의 존재를 부정할 경우와 대비시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1. 우리는 어떤 개체가 요소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발견했을 때 그 요소를 개체를 이루는 궁극적 실재라고 간주한다.

  2. 그 요소가 더 작은 요소로 분석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다시 그 분석된 결과를 궁극적 실재로 간주한다.

  3. 그런데 이런 분석이 무한히 계속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4. 아무리 작은 미립자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그보다 더 작은 미립자로 분석될 수 밖에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5. 이는 곧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궁극적 미립자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6. 개체적 물질을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그 안에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궁극적 요소, 즉 개체를 형성하는 궁극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7. 색은 그 자체 내에 자기의 존재 근거나 존재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게 된다.

  8.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체 존재의 궁극 요소가 존재하지 않기에 결국 그런 것들이 쌓여 이루어진 개체마저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모래가 쌓여 모래성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을 색으로 고찰할 경우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는 과연 무엇인가? 쌓여 이루어진 모래성인가, 아니면 그 성을 이루는 모래인가? 모래성은 모래를 쌓아 놓으면 있지만 모래가 바람에 흩어지면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쌓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요소로 다시 분석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 없어질 수 없는 것, 한마디로 말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물질(색 色)의 궁극적 미립자를 불교에서는 극미(極微)라고 한다.


<유식무경>이라는 책 속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매우 눈에 잘 들어오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불교는 세계를 '연기 緣起'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불교에서의 유식사상은 이러한 부분을 인식주관인 우리 스스로에 관한 이해를 통해 보여주려는 시도라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떠한 설명의 방법을 체계화하고, 도식이 정교해지면 질수록 자꾸만 존재론적 ontological 접근을 하게 된다. 나 역시 3년 전 이러한 오류를 범했다. 그러다가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보고, 인도철학의 역사적 흐름에 흥미를 갖고 연작을 만들었다.


“My dear,

as by one clod of clay all that is made of clay is known,

the difference being only a name, arising from speech,

but the truth being that all is clay.”

KHANDOGYA UPANISHAD (6TH PRAPATHAKA, 1ST KHANDA)


베다와 우파니샤드로 이어지는 인도철학의 흐름은 소위 진정한 존재, 참나 the true-self 의 추구로 이어진다.

그렇게 <다면체탐구 Exploring Polyhedron>이라는 연작이 만들어진다:


이 연작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가상현실은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디지털 정보와 현실의 사물 은 모두 ‘전자 電子 electron’를 기반으로 하기에 본질적으로 같다ㄴ(Platonic Solids 설명 참 조). 따라서 이런 것들은 그 경계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으며, 애초에 그 경계 자체도 모호한 것이다. 이 사진 연작은 디지털 사진, 3D 프린터로 만든 대상물들을 통해 현실, 사물 그리고 지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존재와 본질의 세계에 의문을 품다


인도의 구루 guru 들이 종종 드는 비유 가운데 '소금인형 salt doll'의 심상을 이용한 것이 있다. 소금 인형이 바다의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서 바다로 들어가 바다의 일부가 되는 것과 같은 비유들은 소위 말하는 The True Self에 관한 이들의 오랜 탐구의 여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묘사다. 그러나 그러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무언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준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인도철학은 심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것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문득 나에게 거대한 깨달음, 우주의 원리를 이해한듯한 메시지로 다가오던 감동은 사라지고 그 전반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약 1년 정도 이러한 문제를 놓고 고민했는데, 그럴수록 이러한 존재론적 귀결로 이어지는 생각들은 무언가 굉장히 불편한 느낌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2019년 작품 전시 이후에 이 고민은 전환점을 맞고 불교의 원류격이라 볼 수 있는 사고방식과 그것이 구축된 맥락을 확장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2019 인천 동아시아 사진미디어 페스티벌> 대표작가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렇게 3년 가까이 지나 현재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것을 가합(假合) 상태로 이해함’을 요로 본질과 실체는 ‘인간의 인식이 지어낸 망상’이라는 주제로 작업의 가닥을 잡았다. 6가지, 영장류의 유전자 속에 담겨있는 얼굴 표정을 주제로 고민했던 작업은 그렇게 기억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리고 조금 다른 방법으로 얼굴을 담아보기 위해 많은 테스트 촬영과 그 기술적 구현을 고민 중에 있다.



나 즉, 사람의 얼굴로부터 시작하는 여정


2019년 <응시, part-1>, 2020년 <응시, part-2>를 통해 우리의 실존적 여건, 인식 과정 전반 또한 가합적임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사람의 얼굴을 소재로 진행하게 되는 이 작업에서 또한 나 자신, 우리 자신에 관해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 또한 하나의 사건이며, 복합적 층위의 네트워크적 사건으로 이해해 나가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려 한다.




 

<The Embodiment - the process of some cases of portrait photography works>


2020년 11월 6일에 적어보는 작업 노트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거나 없다는 것,

존재 혹은 비존재에 집착하지 않는다.


- Nāgār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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