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凝視, 空의 感覺>
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sense of suññata
<業 Karma>
2018, Inkjet print, 16 x 24 inch
카르마(karma, कर्म)란 무엇인가?
오해는 고민을 만들고, 문제해결의 의지를 가진 사람은 해결의 실마리를 내놓습니다.
인류가 가진 사고(思考)의 동시대적이지 못한 특징은 본맥락과 동떨어진 해석을 통해 아주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베다>의 구전전승을 바탕으로 후원을 받고 제사를 지내주던 아리안 유목민 사제들의 제식행위(ritual works)를 가리키던 말은 대륙을 따라 복잡하게 남하하면서 각기 다른 사람들과 시대를 통해 인도 북부에 전해졌고, 수십세대에 걸쳐 각기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전해진 말들은 이미 먼 옛날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접경지대에서 이뤄졌던 <리그베다> 제식의 맥락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뒷마당 장독대'는 신줏단지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뚜껑을 열어 직접 맛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한 두 세대만 지나도 하나의 문화권에서 언어는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우리는 인위적인 역사 인식을 통해 오랜 세월이 흐른 문화들을 우리의 것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정도 세월이 흐르게 되면 사람들은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이 더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보존된 '단어', '개념'들을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언어는 굉장히 큰 변화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카르마'라는 단어는 처음에 어떻게 쓰였을까?
이러한 부분들을 역사적 맥락에 투영해 더 정확히 알아갈 필요가 있음은 틀림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동시대적' 층위에서 '카르마'란 본래 어떠한 목적, 의도를 배경으로 '행위'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딕 산스크리트어에서 이 말은 '행위' 혹은 '행위하다'는 의미가 되며, 이러한 의미를 갖는 kárman- 의 명사형이 우리가 아는 '카르마'입니다. 구전 전승을 기본으로 하는 베다의 전승구조상 제식에 필요한 모든 지식은 문자가 아닌 음성언어를 통해 구전되었습니다. 카르마는 바로 이러한 구전된 전승을 기반으로 하는 제식과 관련된 맥락에서 사용된 단어로,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전승된 지식을 가진 사제가 제식의 과정에서 행하는 '행위들'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카르마-칸다" 즉, 제식행위는 희생제사와 그에 뒤따르는 제식행위들은 사제가 '의뢰' 즉, 누군가에게 헌물을 받고 그에 맞추어 필요한 제식을 행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류 거의 모든 문화권에 있어온 아주 흔한 상황입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인도인들이 보존한 오래된 '말'들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어째서 뒷마당 장독대 같은 표현들이 신비주의의 옷을 입고
그 오랜 세월 잘도 버텼는가 하는 것입니다.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제식들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관련 유적은 아르카임(Arkaim)으로 기원전 2050-1900 년경 신타슈타(Sintashta) 문화에 속하는 남부 우랄 초원지대, 러시아, 카자흐스탄 국경이 인접한 지역입니다. 기나긴 이주의 역사와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인도 북부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 아쇼카 왕조 이전까지는 문자가 없었던 문화 등을 고려하며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개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의 모든 위대한 사회제도는 종교에서 탄생했다.”
- 에밀 뒤르켐(프랑스 사회학자)
다른 개체를 지향계로 이해하는 능력, 재귀적 추론과 자기반성과 성찰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지능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관계망 안에서 자신을 정의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관계망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념, 추상관념은 사회화를 거치며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 안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관념을 공유하고 수용할 때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사실처럼 우리의 삶에 들어옵니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의 감각해석, 감정, 더 나아가서는 의식들도 이러한 존재론적 층위를 점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정되는 대상물은 아니지만 분명히 경험되고, 공유되고, 인식됩니다. 시간이 사건들의 네트워크에서 도출되는 모습인 것처럼, 의식 또한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반응의 누적에서 도출되는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정체성' 혹은 '개체성'의 모습은 단일한 통일된 굴레가 아니라 그보다는 합의되고 조율된 일정한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인 듯 합니다. 나 자신의 문제를 두고 볼 때도 '나'라는 배타적 범주가 아니라 '나'로 합의되는 혹은 수렴되는 개체적 지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관념 특히 그러한 관념을 형성하는 언어의 습관들은 합의, 수렴, 지향성을 갖기보다 규정하고 격리하는 경향을 더 강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언어를 발전시켜온 생물학적, 사회학적 역사를 통해 언어, 개념, 관념이 '격리/ 분리'에 근간을 두는 지능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통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명제 전 단계의 제스춰, 음성언어의 단어 등을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정한 발성, 동작, 묘사 등을 현상황 즉, 그것이 '손'이나 혹은 '공기의 진동'이라는 지점에서 의미와 분리합니다. 손으로 둥글게 묘사하는 대상은 과일이 되고, 공기를 흔들며 전달되는 소리를 특정한 의미를 갖는 패턴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손 자체, 소리 자체로만 받아들이면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집니다.
이렇듯, 고등언어 즉, 우리의 의사소통은 의사소통의 물리적 수단과 그것에 부여되는 개념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가능합니다. 목적지향적이고, 한정적이며 또한 배타적인 특징은 이미 우리 언어의 출발선상에서부터 있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지점에 오지 않았나,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은 그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가 성취해 낸,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입니다.
additional notes:
사물과 개념의 모호한 경계
-- 나는 왜 3D 프린터를 이용한 조형을 시도했는가?
'근원'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결론을 닫아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시뮬레이션을 완료하고 싶어하는 것은 영장류적 지능의 특징이다. 우주는 "만물은 OO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기술 자체를 거부한다.
사물과 개념의 경계에 대한 고민은 이처럼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는 플라톤 다면체 Platonic Solids 를 #3D프린터 를 이용해 만들고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업 과정을 진행하면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 Whitehead 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를 중심이 되는 생각으로 상정했다. 사실의 세계 너머 본질의 세계가 있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기호, 상징, 개념을 이용한 지적 탐구의 세계로 향하는 초석을 닦았다. 상상과 언어 속에 머물던 세계는 인간이 만든 '장치'에 의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empirical world)로 들어선다. 디지털 단말은 개념과 논리의 '사실화'라는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도 단말(端末, terminal)이다.
그렇다면 조금더 극적으로 관점을 돌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기본적으로 그것은 경험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양에 있다.
우리가 눈앞의 달걀을 '진짜'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서 비롯된 정보에 모두 부합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달걀'이다. 흔히 하게되는 상상처럼 우리의 뇌에 전기자극을 주어 '진짜 달걀'이 있다는 정보를 주입한다면 그것은 뇌에 직접 전달되는 전기자극만 존재하게 되므로 소위 '현실'에서 말하는 시공간 점유 즉, 뇌 밖의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줄어든다. '질량'이라는 형태로 시공간을 점유해야 즉, 원자를 비롯한 물리적 세계를 프로그래밍하는 정교함과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진짜 달걀'이라는 사태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그 충분한 정보를 통해 '진짜 달걀'과 동일한 달걀을 '제작'한다면 어떤가? 그것은 '진짜 달걀'이 아닐까?
원자 단위의 복제와 #3D프린팅 기술이 가능해져서 원자구조까지 같은 달걀들을 양산한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접했던 달걀들보다 더 일관된 상태의 달걀을 얻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결여'가 현실을 결정하는 것인가? 원자 단위에서부터 동일한 달걀들이라면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고 느끼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에 비추어 본다면 사진적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즉, 그것이 '진짜 사진'이 되기 위해서는 화학인화에서 수반되는 물질과 정보의 열화가 있어야 한다는 상황이 이해된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현실감은 정보의 완벽한 충족은 아닌 것이다. 이는 마치,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경계도 모호한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입자적 사태가 존재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
언어에 의한 사태의 묘사, 자전적 기억, 강화되는 이야기와 정교화되는 개념화. 인류가 세상을 인식하고 재해석 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한 순간, 세상은 더 확연히 가상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은 사례를 다루는 것 외에는 긴 설명이 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처음 다면체 탐구의 구상은 '사물은 개념이다'에서 출발했다. 조금 더 와닿는, 이질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인간이 만드는 사물은 언어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것을 기본으로 하는 생각 자체에는 큰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중점을 옮겨 현실, 현실인지, 현실극복(지배)으로 조금 더 일관된 관점으로 변했다. 초기 구상이 구불구불한 선과 같았다면, 수정된 안은 3개의 점을 일직선으로 이은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실과 가상현실 즉, 현실과 매트릭스는 기본이 다르지 않다
“What is real? How do you define 'real'? If you're talking about what you can feel, what you can smell, what you can taste and see, then 'real' is simply electrical signals interpreted by your brain.” ― Morpheus, <The Matrix>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은 반대로도 그리고 다르게도 생각 가능하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A.N.Whitehead)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늘상 '차이의 방법'에 의해 관찰하기 때문에 하나의 부각된 형상 혹은 개념이 있으면 다른 쪽은 생각하기 어렵다. 현실과 가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를테면 1,884 bytes 의 STL 파일은 3D 프린터라는 장치를 통해 사물이 된다.
1 byte 는 8 bits 이다.
따라서 1,884 bytes 는 15072 bits 가 된다.
이것은 하드디스크의 경우 플래터 표면에 자성입자다.
USB 메모리 같은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플로팅 게이트의 전하량으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장치의 OS에서 1,884 bytes 의 STL 파일이 된다. 이것은 1,884 글자로 이루어진 문자열이다.
이 문자열은 STL 파일을 다룰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에서 시각화된 데이터로 제공된다.
이것을 FDM 방식의 PLA 필라멘트를 이용하는 3D 프린터에서 3D 프린팅 가능한 G-code 로 변환하여 작업하면 사물이 된다.
플래터 표면의 자성입자 혹은 플로팅 게이트의 전자 상태가 디지털 정보의 본질이다.
입자의 운동이 우주의 근본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실상 디지털 정보나 우리의 현실이나 전자의 활동이 근본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
세상과 통섭하는 인터페이스가 탄소 기반인 우리의 신체냐 규소 기반인 장치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간다면, 입자성, 비결정성, 관계성. 이것이 물리학이 보여준 것들이다. 분명 사물의 근원이 되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관찰할 때' 그것이 '입자'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입자는 상호작용 안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미시적 차원에는 결정성의 부재 즉, 확률적 접근만 가능하다는 것이 자연의 특징이다.
'입자'를 '근본'과 동일시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결론을 닫아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시뮬레이션을 완료하고 싶어하는 것은 영장류적 지능의 특징일 뿐이다. 우주는 어쩌면 "만물은 OO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분성의 한계에 있는 어떠한 '입자' 혹은 '입자적 사태'를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은 다음 작품에서 풀어가야겠다는 방향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저것을 이룬다"라는 선형적인 인과 인식은 우리가 인식하고 살고 있는 거시계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될 수 있어도 뭔가 더 깊은 이해를 해보겠다고 시도하게 되면 분명 부족한 견해가 되는 것이다.
나는 선형적 인과 인식에서 비롯된 일종의 존재론적 원인에 대한 부정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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