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sense of suññata
<凝視 Contemplative Contemplation #3>
2020, Inkjet print, 150 x 100 cm
Yatonidānaṁ, bhikkhu, purisaṁ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
(a person is beset by concepts of identity that emerge from the proliferation of perceptions)
인식의 창발에서 비롯된 주체적 개념화가 사람들 둘러싸고 괴롭힌다고 합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 중 하나인 <맛지마 니까야>에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불교학자들 가운데에는 이 문장이 등장하는 부분이 훗날 <금강경>과 같은 대승경전을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해준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불교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인데, 제가 이 문장으로 작품에 관한 소개를 시작하는 까닭은 바로 이 작품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언어와 우리 사고가 가진 '개념화'라는 기본 방향성이 어째서 실상을 반영하지 못하는가에 관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언어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에 관해서는 수많은 가설들이 있습니다.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기호논리학적 관점의 인용은 우리가 가진 언어의 사용과 전달 과정 등을 구조적으로 잘 설명해주지만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저는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의 부소장을 지낸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의 연구에서 설득력을 발견합니다. '언어'를 별개의 행위로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시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 많은 것들이 어느 정도 이상의 밀도를 이루면 새로운 층위(layer)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기본적으로는 지사 혹은 제스처(gesture)에서 인간의 언어로의 이행을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제스처를 조합에 명제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는 행위자와 의미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정보의 공통기반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제공자가 있는 경우 커뮤니케이션이 연장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아주 단순한 단계의 주부 - 술부 구조를 형성합니다. 또한 다양한 행위를 의미와 연결하는 과정은 상징(symbol)을 다루는 초기 단계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공동의 목적을 지닌 공통된 개념을 두고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개체들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소위 '객관적'이라 볼 수 있는 공통기반을 다질 수 있게 만듭니다.
세계적으로 매우 독특한 인식철학자로 알려진 데니얼 대넷(Daniel Dennett)은 오늘날 인류의 뇌와 뉴런, 신경계 등의 관계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인류 언어가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가진 구문론적 특징을 언어 발달 초기 호미닌의 신경구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거꾸로 풀어보면, 인간의 뇌가 언어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초기 인류의 뇌 구조에 적합하게 언어가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음소는 단어를 만들고, 단어는 일종의 가상 DNA 처럼 유지되며 전달됩니다. 음소는 청각적 디지털화 digitalization 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각각의 독립적 음소들이 재조합되며 단어를 형성하고 그 의미를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우리는 인간의 언어에 관해 크게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본적으로 뇌가 언어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언어가 뇌에 적합하게 정착되어 다시 무수한 시행착오를 통해 오늘날 인류의 사고를 구성하는 구조물을 서로 형성해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상징 제스처를 중심에 두던지 혹은 그저 상징 symbol 을 중심에 두던지 간에 언어는 기본적으로 일차적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분리해 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굉장히 다양한 것들을 다룰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경구조가 언어의 구문적 syntactic 특징을 결정지었음을 근거로 평가해보면 어째서 물리법칙과 우주론이 우리의 직관과 그토록 맞지 않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면 당연히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의미있는 통찰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논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수많은 결론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우리 신경구조적 한계로 인해 실상 반영과 관련해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언어의 문제를 재평가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즉, 언어가 가진 구조적 결함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세상의 실상을 이해하고 생각이 누리는 자유의 지평을 확장시켜주는 매우 중요한 지점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경구조가 언어의 구문적 syntactic 특징을 결정지었음을 근거로 평가해보면
어째서 물리법칙과 우주론이 우리의 직관과 그토록 맞지 않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분리의 경향'이라는 언어의 구조적 특징으로 인해 우리는 사실과 개념을 쉽게 혼동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계는 물론 철학계에서조차 데카르트적 사고가 갖는 문제를 지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A.N.Whitehead)는 개념과 실상의 혼동을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표현하며 "단순정위 simple location"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이를테면 방안의 호문클루스와 같은 사고 방식은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와 같은 문헌에서도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바로 현대 과학과 철학이 문제로 보고 있는 지점이 이러한 관찰자 시점의 의식과 같은, 우리 자신과 분리된 어떤 자각있는 주체 혹은 근원적 대상을 상정하는 것임을 짚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1분 7초와 66분 노출로 촬영된 두 장의 사진을 다른 크기로 겹쳐 인화한 것입니다. 이 두 시간의 길이가 이러한 관념과 실상의 문제를 다루고자 선택된 것입니다.
11분 7초는 아비다르마 학자들에 의해 불교의 개념으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는 '찰나'의 전통적인 시간적 길이를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여 5만을 곱해 만든 시간 길이입니다. 우리말 '오만가지 생각'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딘가에 갇혀있는 동시에 일관성이 부족한 우리 생각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만가지 생각'이 갇혀 있는 틀, 바깥쪽 넓은 부분은 66분이라는 노출시간을 가진 사진입니다. 기원전 26세기경부터 7의 신비주의를 다룬 문헌은 수메르에서 등장합니다. 고대근동 문헌에서 7과 40을 사용한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무결함이나 어떠한 준비가 완성됨을 표현하기 위한 수비학적 형용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를 뺀 6과 같은 숫자를 불완전성 표현을 위해 사용합니다. 창세기에서 6일 동안 이루어지는 창조 후 7일째 안식이 묘사되는 것, 계시록 같은 문서에서 6을 3번 반복해 '짐승의 표'를 묘사하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시간 길이의 의미를 통해 저는 인간의 불완전하고 일관성 없는 생각은 개념화의 틀에 갇혀 있음을 그려내고자 하였습니다.
additional notes:
귀류법(歸謬法) - 고대 인도의 논리학: '프라상가 prāsṅga' 논법이라고 부른다. 상대의 주장, 반대하고 있는 개념을 진리로 간주한 다음 그것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면 사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나의 주제 작품 '4번과 6번 노출 <오만가지 생각>'은 '귀류법적 표현'이며 그 시각화다.
"조르주 뒤메질(George Dumézil)의 기능주의에 의한 사회적 환원 방법에 따르면, "신화, 의식 혹은 상징은 그 어원을 밝히자마자 곧바로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원 분석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인도 불교와 자이나교> (김미숙)
이 작품은 교에서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 하듯이 개념화의 증대와 그것을 실체화한 논의들은 적절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표현한다.
오만가지 생각의 주기 11분 7초의 도입은 '마음'과 '찰나'의 긍정이 아니라 그것이 부적절함에 대한 것이다.
고대근동 수비학의 66이라는 상징수를 이용한 것 또한 '불완전성' 즉, 개념화 증대와 그것의 실체화는 결국 '오해'임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근동 수비학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경우 우주론을 그려 나갈 때 그것들을 기능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현상의 인과는 자연법칙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권리에서 비롯된다는 사고방식이 저변에 깔려있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논하며 자연/초자연의 이분법적 설명을 하는 것에 대한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의 비판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신(神)’이 가리키는 ‘야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는 자연과 초자연이 구분되는 세상이 아니라 자연의 인과법칙 자체를 야훼의 권능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세계다.
고대 근동인들에게 세계는 신들의 활동이었다. 고대 수메르인들과 이집트인들은 정교한 달력을 만들어 냈고, 태음력과 같은 계산법을 통해 1년을 계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러한 나타남의 근간은 신들의 활동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천체는 물론 날짜들에도 신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6의 문제 = 7은 왜 많은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가?
7은 고대 수메르 시대에서부터 상징적인 숫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매우 신비로운 숫자였다. 고대 수메르는 60진법을 사용했던 문명으로, 60은 12개의 숫자를 인수로 갖는다.
재미있게도 1, 2, 3, 4, 5, 6까지 연속되다가 10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수메르인들에게 7은 기묘한 숫자였고, 기원전 26세기경부터는 7의 신비화가 반영된 문헌들이 발견된다.
수메르 시대부터 7을 신비로운 숫자로 여긴 탓인지 이러한 접근 방법은 다양한 고대근동 문헌에 등장하며, 창세기에서는 6일째까지는 창조를 7일이 되면 휴식이 등장한다. 이집트의 수비학에서 7은 완벽함 혹은 어떠한 주기의 완성을 의미했고 시대가 흐르며 7은 고대 근동 문명 전반에서 점차 신성과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이러한 수비문학적 전통에서 6을 불완전수로 사용하는 용례가 많이 등장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의 첫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6개의 유대인 정결의식에 사용되는 항아리’가 등장한다. 상징적으로 이해해보면, 물로 씻는 유대인 정결의식의 불완전성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성이 대신하게 될 것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문화들에서 7은 특별하게 다루어진다. 행운의 7과 같은 생각은 물론, 일본에서도 칠복신(七福神, しちふくじん)이라 하여 각 분야별로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들에 대한 이해가 있다. 60의 인수가 아니라는 점, 소수라는 점, 닭의 부화에 걸리는 시간 등에서 사람들은 7을 특별한 숫자로 여겼다.
또한 완전수적 인식, 날짜 계수의 보편화 등이 자리 잡은 후에는 완전수 상징인 7과 40을 곱하면 인간의 임신기간이 나온다고 믿었다.
나는 66을 불완전수의 상징으로 작품에 적용했다. 이것을 인도 문명에서 동아시아로 전해진 ‘찰나’와 ‘오만가지 생각’을 감싸는 형식으로 표현하여 인간의 마음, 인간의 인식이 갖는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시 작품을 맺는다.
찰나와 오만가지 생각
무아(無我)를 역사적 맥락에서 독립시켜 불교만의 사고방식으로 바라보게 되면 오늘날 흔히 일어나는 문제처럼 매우 신비주의적이 되거나 잘 해야 선정(禪定)적 접근이 가능할 뿐이다. 이는 번역어와 번역사를 고려하지 않은데에서 비롯된 단순화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동아시아 문명의 경우 유위(有爲) 혹은 무위(無爲)와 같은 번역어를 노자의 사상과 연결하는 경향을 보인다. 분명 유사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격의불교를 통해 '해석되며 수용된' 불교가 동아시아에 오랜 세월 정착이 가능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도-아리안 언어 전통에서 보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노자와 중국의 사상에서 바라보는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아(我)의 이해도 이러한 맥락이다.
야즈냐 - 베딕 - Post 베딕으로 이어지고 전해지는 생각의 근간을 놓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아(我)'는 동아시아 언어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에 그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다.
무아(無我)의 논의는 '내가 없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간을 외부세계 혹은 현상과 본질을 불연속적으로 나누지 않는데 중점이 있다. 왜냐하면, 인도-아리안 문화를 한역할 때 사용하는 '아(我)'는 기본적으로 나를 가리키는 인칭대명사가 아니라 '아트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찰나'의 문제도 이러한 맥락이다.
인도-아리안 문명에서는 존재론적 본질을 상정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언어의 구조적 특징 중 하나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것은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문명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북유럽 신화, 그리스 철학, 인도-아리안 문화가 이러한 경향들을 강하게 보여준다.
찰나는 기본적으로 '마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호작용, 상호인과(mutual causality)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본질' 혹은 '독자성'을 기반으로 접근하게 되기에 생긴 문제다. 무상(無常)함이란 그것을 어떠한 허무함으로 보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려는 관점이 아니라 그것이 항구적이거나 영원하다거나 하는 어떠한 '추이'를 배제하고 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찰나는 불교의 초기 승단에서 "한 생각이 생겨나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시간을 설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아비다르마와 같은 초기 승단의 학자들은 한 찰나 क्षण Kṣaṇa 에 생각이 생겨나고 उत्पाद Utpāda 사라진다 भङ्ग Bhaṅga 고 보았다.
120의 찰나를 1달찰나(一怛刹那, 약 1.6초), 60달 찰나를 1납박(一臘縛, 약 96초), 30납박을 1모호율다(一牟呼栗多, 약 48분), 30모호율다는 1주야(一晝夜, 24시간), 따라서, 1찰나(刹那 क्षण Kṣaṇa)는 1/75초가 된다.
티벳 불교에서는 1찰나(刹那 क्षण Kṣaṇa)를 약 0.0001초 (손가락을 튕기는 시간의 1/360)로 정의한다(2005년 8월 Geshe Thupten Kunkhen, <불교와 양자역학> Vic Mansfield에서 재인용)
나는 '찰나'라는 인식은 존재론적 사고관념의 근간, 불연속적 이분법의 관점에서 '무상함'을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실상은 초기경전에 대한 부적절한 해석 방법이라고 보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무상함을 순간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떤 근본요소의 상정 시도이며 이는 불교의 기본적인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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