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sense of suññata
<불수의적 반응 Involuntary Reaction>
2018, Inkjet print, 106 x 74 cm
우리는 처음부터 의지로는 '통제되지 않는' 시지각 정보처리 과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실존적 한계 상황 안에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빛을 수용하는 부분이 망막 혈관 뒤에 있습니다. 우리는 망막을 지나는 수많은 가닥의 모세혈관 그림자로 뒤덮힌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인데, 항상 고정되어 있는 혈관은 우리의 시지각(視知覺, visual sense)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조정됩니다.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눈에 남는 잔상으로 인해 밝은 점들 안에서는 검은 부분이 생겨나고, 강제되는 시선의 움직임으로 인해 어지러운 느낌을 받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조금 심해지면 점들이 배열된 직선상의 배열이 휘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시지각 정보처리 과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실존적 한계 상황 안에 있음을 인지시켜주고, 그것을 위한 방법으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시선의 움직임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나의 눈인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나의 눈인가?'라는 질문에 빠져 엉뚱한 길을 선택하기 쉽다는점을 빨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우주적 자아와 같은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은 언어가 가진 '고립'의 특징에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먹기 위해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과 우주의 근원을 상상하는 것은 같은 생물학적 이유로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생각입니다.
불명확한 경계들은 우리 자신의 불수의적 반응들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
안팎 혹은 자타의 경계는 '인식주관'이라는 개념을 걷어내면 애초에 분명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나'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정리하겠습니다. '나'를 정의하는 특성들은 안에서 제공되고, 밖에서 유입되는 것들의 다채롭고 유기적인 반응을 통해 자리합니다.
우리는 '언어'라는 능력을 얻게 된 머나먼 그 옛날 어느 날로부터, 그때그때 성분비가 조금씩 다르고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유지할 뿐인 다소 특정한 사태를 가리켜 '나' 혹은 '너' 혹은 '우리'라고 명명하는 관습을 따라.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있지도 않은' 나, 너, 우리를 찾겠다는 일념하에 인생의 상당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시지각이 '나'라는 주체를 기반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 복사의 정점(peak)을 감각에 활용하려는 생물의 '반응'이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보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도' 거주 가능한 생명체 거주가능영역(circumstellar habitable zone), 소위 '골디락스 존 Goldilocks Zone'에서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우리 항성의 에너지 활용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지금처럼 '이렇게' 보고 있는 까닭은 태양이 가진 빛의 특성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시광선 visible ray'이라고 부릅니다.
경계의 불명확함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반응들이 '나'로 알려진 '사태'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구성하는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지를 즐거워하기 보다는 몹시도 불쾌하게 여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시선인가?'와 같은 존재론적 배타성을 떠올리지 말고,
'왜 이렇게 보는가?'로 질문을 옮겨봅니다.
이 전시의 흐름은 바로 이러한 '조정 turning' 작업을 그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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