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라는 여정에 올라 4복음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나면 사도들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것에 뒤이어 사도 바울의 <로마서>가 뒤따른다. 바울은 곳곳에서 로마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했으니 로마에 개척된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상황은 아무래도 그의 인생에서도 꽤나 후반기의 이야기이지 않을까? 그런 서신이 이렇게 앞쪽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들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성서는 대부분 바울의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만큼 그가 받은 영감과 거기에서 비롯된 메시지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전반을 읽어가다 보면 일종의 모순 같은 것이 보인다. 야고보의 메시지와 상충하는 바울의 주장이다. 바울은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일관 주장을 펴고 있고(갈라디아서 3장),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보서 2:17)이라는 주장을 편다.
사진의 예술 논쟁을 밀어내고 본격적인 사진가들의 활동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의 공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사진이 예술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재인식 그리고 개념화에서 그 대답을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개념 concept'인 것이다.
사진은 피사체를 발견하면서부터 '발견된 오브제'미학이다.
사진은 즉흥적으로 사물과 대면한다.
사진은 발견되면서 피사체에 의미가 부여된다.
마르셸 뒤샹의 '행위'가 사진과 만나는 '접점'이다.
마르셸 뒤샹의 변기에서 얻는 것은 개념의 힘과 중요성이다.
어떻게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떻게 찍었건, 오브제에 대한, 피사체에 대한 새로운 재인식의 개념.
재인식의 개념만이 예술이 되는 변별력이다. 사진이 예술이 되는 당위성이다.
<사진철학의 풍경들> by 진동선
사진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재인식'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사진은 의미를 담아야 하며 하나의 (혹은 그 이상의) 개념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문자에 근거한 상징활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기에 결국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하나하나 개념화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천적 논의일 때는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No ideas but in things." - William Carols Williams
이 말은 "의미는 없다. 오로지 사물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문장으로 번역되었다(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박태희 역). 저 말을 남긴 윌리엄스의 이름은 꽤나 사진적이지 않은가? 중간에 캐롤스를 두고 윌리엄과 윌리엄스가 뒤따른다. 마치 카메라를 두고 사물이 사진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문장을 인용한 퍼키스 Philip Perkis 는 그에 앞서 이런 글을 적었다.
The object-ness of what is seen. No fast jump to metaphor or symbol. No 'cultural context.' Too soon. Plenty of time for that later. First, the 'reality' of light on surface.
보여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 필립 퍼키스 <사진강의 노트> , 박태희 역
아주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이런 퍼키스의 생각이 스티글리츠의 개념화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을 설계하는 엔지니어링이라면 조금 더 쉽게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것이 '선행'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퍼키스는 이토록 상상하지 말고 인식할 것을 강조하고, 보이는 것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우선하라고 충고하지만 그의 작품 경향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즉 개념화와 분석을 거쳐보면 그가 특정한 사물들에 흥미를 보인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퍼키스는 어떤 경계면, 벽, 철조망, 부서진 구조물, 비닐, 천, 시트 등에 일관된 관심을 보인다. 의식이냐 무의식이냐의 문제를 떠나 그 역시 선호하는 것이 있고 '사진화'를 하기 위한 대상물의 범위를 정하고 있는 것이다.
0과 1이라는 디지털적 사고방식은 예전부터 존재해왔다. 인도유럽어 문화권의 주요한 사고방식이 있냐/ 없냐 혹은 선/ 악, 이것 혹은 저것으로 나뉘는 것처럼. 흑백사진은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적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흑백사진의 매력은 존 시스팀 zone system 등에서 설명하는 완전한 밝음, 완전한 어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뒤섞이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개념화, 재인식 혹은 순수한 바라보기, 받아들임을 본질적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