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 of photography is the act of 'phenomenological doubt.'"
(But the ‘mathesis’ of this doubt (its deep structure) is prescribed by the camera’s program.)
- Vilém Flusser
플루서가 수학적 구조와 카메라의 프로그램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디지털 카메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프로그램에 대한 생각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프로그래밍이 오늘날과 같이 코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될 부분이다. 우리는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벌써 언어의 사용 방식의 시대적 격차를 경험하고 있다. 사실 이런 문제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다른 언어로 기록된 고전의 번역에 있어서 오늘날 통용되는 개념으로의 전환과 같은 고민을 위해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이미 수십년 만에 이것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우리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1. Photographers' practice is hostile to ideology.
Ideology is the insistence on a single viewpoint thought to be perfect.
Photographers act in a post-ideological way even when they think they seeing a ideology.
사진가의 행위 즉, 사진을 찍는 것은 이념에 적대적인 행위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 안에는 분명 복제(duplication)라는 행위가 포함되지만 역설적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이전의 사례를 완전히 동일하게 복제하는 행위를 달성할 수가 없다. 존 사코우스키 John Szarkowski 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가장 독창성이 떨어지는 사진가 조차도 과거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대가들의 작업을 그대로 복제하는 식으로는 다루지 못한다 even the most servile of photographers has not yet managed to duplicate exactly an earlier work by a great and revered master"는 것처럼 말이다. '이념 ideology'을 특정한 생각이 완전하다고 단언하는 것이라고 볼 때 사진은 어떠한 의미로도 그러한 조건을 달성할 수는 없다. 때문에 사진가의 행위는 탈이념적이 된다. 그들 자신이 어떠한 이념에 의해 생각하고, 바라본다고 믿을 때조차 그렇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약호 code 없는 메시지'와 대면하였다. 사진은 거대한 이미지군 중의 가장 최후의 (개량된) 이름은 아니며, 정보경제학의 결정적인 돌연변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개념 concept 이다. 바라보는 모든 관점에서 계속해서 개념이 형성된다.
사진은 종종 사람들이 과도하게 진지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있다. 근본적으로 사진은 어떠한 특정한 생각에 천착해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 표정의 어떠한 특징들을 조소하고, 상황 속에서 맹시로 인해 발견되지 않던 것들 - 어떤 이는 이것을 시각적 무의식을 들춰낸다고 표현한다 - 을 들춰서 웃음거리로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알려졌다 한들 어느 순간 눈을 깜빡일때면 사진 속에서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눈에 보이는 정보 중 1/3000 정도 만이 뇌에 저장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사진가가 어떠한 이념이나 사고방식에 의지해 작업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지 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작품 햄릿 속의 유명한 대사처럼 말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자네의 배움으로는 꿈에도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네.”
(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 햄릿 (Hamlet 1.5.167-8)
플루서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간주관성'이라는 개념을 만난다. 진리란 결국 각각 다른 입장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합의점을 찾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유레카의 외침이 아니라 합의의 시도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갈릴레오의 글 속에서 찾을 수 있듯이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의 순간에 대한 기록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한순간 진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흐름과 연결 그 자체가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결정적 순간'의 까르띠에-브레송조차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한다. 기술 description 을 위해 파편화라는 편의를 취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2. Photographers' practice is fixed to a program
Photographers can only act within the program of the camera, even when they think they are acting in opposition to the program.
단적으로 사진가는 카메라의 기본적인 기능과 제한사항을 벗어나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사진에 능숙한 사람일수록 기본적인 기능에 기계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 되면서는 흔히 '침핑 chimping'이라 불리우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전통적인 사진 행위에서 이것은 우스운 동작일지 몰라도 이를통해 오늘날의 보도사진들도 더욱 정확한 정보를 포함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디지털의 조작 manipulation 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디지털 사진의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믿겠지만 사진의 조작은 화학인화 시절부터 가능했고 사진의 태동기 대부분의 작업은 합성사진이었다는 점을 잘 모르는 정보부족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글의 시작은 사진의 행위가 기본적으로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간결하게 보려는 것이었는데 조금 엇나가고 있는 듯 하다.
두번째의 결론은 결국 사진을 하는 사람은 카메라가 가진 기능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무 無無'라는 말처럼,
근본적으로 무(無)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있음'을 논했기 때문에 무(無)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설령 무(無)를 논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인지되지 않는 것이라면 굳이 알고자 하는 행위가 무슨 소용인가? 나는 사진이 가르쳐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성과 한계성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 행위를 사진하는 행위라고 할 때,
오늘날 문명 사회 속, 기계를 조작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존재인 인간을 표현하는 행위로 사진만한 것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