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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작년 섬 일정을 다닐 때 읽었던

<해석을 반대한다>를 다시 읽어보고 있다.

"정력과 감성을 희생하면서까지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지식인의 존재가 이미 해묵은 딜레마가 되어버린 문화권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우리 시대의 해석은 까다로운 텍스트에 바치는 충성이 아니라 공격성, 노골적 경멸에 의한 경우가 잦고 파고 들어가면서 해체한다. '진정한 의미', '잠재내용'을 찾기 위해 본문을 제낀다. 손택은 해석을 향해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라고 갈군다.

"이 세계라니? 다른 세계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이 여성의 글은 바르트와 버거로 범벅이 되어 있는 '사진'의 정체성의 고민에 새로운 생각을 주기도 했기에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는 내가 아주 아끼는 책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오랜 옛날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통해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주체로 만드는 계몽주의를 열었다고 하지만 가끔 '그는 왜 뜬금없이 자신의 존재와 세계를 별개로 생각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과 나 자신의 경계는 꽤나 모호한 것인데도 말이다.

암튼,

이렇게 세계와 자신을 별개로 사고하는 서양인들의 방식은 어쨌든 우리에게 아이폰도 만들어주고, 인공위성도 만들어주고 이제는 우주여행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하는 상황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거의 3천년 정도 전에 생각해놓고 옆에 치워둔 것들을 텍스트로 채워주고 있기에 조금 기다렸다가 읽어보고 판단하면 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내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글들을 굉장히 진지하게 여기던 것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사진을 설명하는 말들에서 다소간의 의구심을 느끼면서 부터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사진도 단순히 프레이밍(framing)이라는 중대한 절차 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셋업과 사용 방식, 각종 액세서리의 이용까지 상당히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과연 이 모든 절차로부터 눈을 돌리고 사진을 향해 약호 없는 메시지(messages without a code)라는 정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 언어의 번역이 얼마나 성의없는지도 경험했고 거기에서 비롯된 분노나 좌절도 있었다.

무언가 생각해보고 싶은데 언어가 적절하지 못하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가?

그런 이유로 '우리말 바르게 쓰기' 같은 캠페인을 만나면 화가 먼저 나는지도 모르겠다. 이 언어가 사고를 넓히는 도구가 되어주지는 못하고 규칙이라는 굴레로 우리를 옥죄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폐해는 우리가 넓고 깊은 사고(思考, consideration)를 방해받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불합리한 룰로 합리적 결정을 가로막는 상황을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지 되새겨 본다면 그리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히로시마에서 만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절대자의 침묵이 아니라 역사의 고해성사임을 알게 된다"(장미의 열반, 김아타)는 말처럼 근 몇 년 우리가 만난 사회적 문제들은 특정 세력이나 인물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의 고해성사처럼 우리들 안에 쌓여 있던 문제들이 지탄을 받는 이들을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여겨진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대표성을 지닌 몇몇을 처벌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반성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먼 훗날이 되면 우리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할지도 모른다. 기시 유스케(貴志祐介)가 그의 작품 <신세계에서> 초반,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듯이 말이다.

"역사를 헤집어보고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눈물과 함께 삼킨 교훈이라도

목구멍을 통과한 순간

잊어버리는 생물이라는 사실이다. ...

사람들의 기억이 비바람에 씻겨 사라진

아득한 미래에,

어리석은 인간은 다시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나는 그런 기우를 완전히 버릴 수 없다.”

(신세계에서, 貴志祐介)

손택은 또 다른 복제된 세계를 만드는 것을 경계하고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우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정작 텍스트가, 예술작품이 여기에 있는데 그것에 들어있는 '진짜 의미'를 찾겠다고 손에 잡히는 작품을 옆으로 치우고, 해부해서 결국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드는 행위처럼, 다양한 문제들을 대상화하고 나와 별개로 생각해서 문제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그러한 생각이 결국 지식인이 예술에 대해 복수를 가하 듯,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들에 복수를 가한다.

이 세계의 문제를 이야기하자니,

또 다시 이 세계를 들먹이기 시작한다.

문득 손택의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던 그 순간 내가 틀어 둔 음악은 비발디의 <Nulla in mundo pax sincera>였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 erotics 이다."

- 수잔 손택 Susan Son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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