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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보다


현대 예술사진의 두 가지 위상에는

관찰한 것을 고정하는 실질적인 수단이라는 것과,

여러 시각적 층위들을 오가는 상호작용이

위력을 발휘하는 수단이라는 점이 있다고 본다(Charlotte Cotton).

결국 '본다'는 행위를 통해서 이 모든 행위가 시작되는 것인데, 관찰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고정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사실은 확연해진다.


<Washington D.C. - 2017년 4월 3일에 사진 교체>

문득 한 공안(公案) 속에서 작가가 취해야 할 마음이라 할법한 내용을 발견한다.

"보려면 곧 바라보라. 헤아려 생각하면 어긋나느니라."

"어떻게 보임합니까?"

"성품에 맡기고, 인연에 맡겨 속박되지 말라. 단지 범부의 마음이 다하는 것일 뿐,

달리 수승한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니라."

- 도오와 숭신의 대화 중

때로는 느낌과 감성에 치우치거나 혹은 지나치게 신비롭고자 하는 사실상 '설익은' 욕심을 부리게 될 때가 많은 것은 어쩔수가 없다. 그리고, 꽤나 자주 작업 도중 그러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상 예술이라는 것은 "추상과 사실 사이의 긴장감 속에 살아있다"는 것처럼,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추상화되어 버리는 것은 개인 혹은 자아 속으로 침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견에 열려있다는 것을 전제로, 나는 예술이란 그리고 작품이란 개인 혹은 자아 속으로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추출'이라 여기는 편이다.

"많은 작가들이 전통적인 서술방식을 깨뜨려 더욱 심화된 감성과 정신세계를 펼쳐내기 위해 모색해왔다. 그들에게는 '사실이 보여주는 진실'보다 '감정이 보여주는 진실'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위에서 말한 현대의 예술가 무리처럼 신비로운 느낌을 급조하려고 정보를 폐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 Philip Perkis

정보를 폐기하기보다는 명확하게, 폐기하기보다는 조금 지연시키는 것으로 더욱 더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목적을 위하 하나의 장 field 속에서 구별되는 개체로 인식되면서 살아가지만, 실상은 그 경계도 모호하고, 무엇이 다름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것인데 말이다. 다만, 제한된 조건 속에서의 살아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허함이라 믿기에 일정 부분 제도와 암묵적 룰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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