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사실 세종 이도(李祹)의 한글창제를 두고도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가문의 왕권'을 매우 중시하였기에 건국공신들과 정도전까지 모두 제거한다. 적어도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韓日倂合條約, 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에 들어가기 전까지 조선의 왕은 모두 그의 자손이 이어갔으니 그의 열망 하나 만큼은 끝까지 지켜진 셈이다. 세종이 그러한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지 못했더라면 강력한 중앙집권 강화의 용도로 한글이라는 도구를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잘 알려진대로 세종은 정책적으로 조선의 지식혁명을 일으키고자 했을 것이라는 점에 무게를 실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수많은 정책들이나 알려진 기록들이 말해주는 사실들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본심 만큼은 누군가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본 것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을 것이다.
절반의 지식혁명
그가 지식혁명을 원했다면 사실상 성공하지는 못했다. 조선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한글이 제대로 사용되고 연구된 것은 20세기가 다 되어서야 격변기를 눈앞에 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글을 국문(國文)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고종의 칙령으로 국한문 혼용이 도입된다. 식민시대를 거치며 민족주의 고취를 위해 한글의 연구와 사용에 더 불이 붙었을 것이다.
세종에 손에 의해 조선은 독자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세종은 1418년~1450년까지 조선을 다스렸다. 이 기간 동안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낸 것은 물론, 태종 재위 기간에 개발된 계미자 외에도 1420년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년(甲寅年)에 더 크게 주조한 갑인자라는 활자가 만들어진다. 특히 이 갑인자(甲寅字)는 세종의 왕명으로 만든 것으로, 구텐베르그 인쇄기보다 더 빨리 실용화 된 것이며, 구리를 이용해 개량한 이후로는 구텐베르그 인쇄기의 10배 가량의 인쇄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했다.
그런데, 유럽은 구텐베르그 인쇄기를 인류 역사적 지식혁명의 계기로 꼽는 반면, 독자적인 글자와 더 뛰어난 인쇄술까지 갖춘 조선의 기술은 사실상 세계사에서 잊혀졌다. 왜 그랬을까?
암튼, 한 번 세종이 지식혁명을 원했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해를 위해 짚어보는 연대기와 비교
밀라노 칙령 - 313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 325년
삼국시대 불교 - 372년
경자자(庚子字) - 1420년
갑인자(甲寅字) -1434년
한글 창제- 1443년
요하네스 구텐베르그가 인쇄기를 제작 - 1445년
요하네스 구텐베르그가 마인츠에 인쇄소를 개업 - 1448년
42행의 구약 성서 인쇄 - 1453년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공통 서사의 부제
지식혁명이 불가능했던 원인으로 조선의 관료들이 체제와 권력유지를 위한 책만을 찍었다는 식의 주장은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지 못하는 발상이다. 구텐베르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유럽의 금속활자는 체제유지에 저항했는가? 그가 인쇄기로 수익을 올렸던 방법은 면죄부를 인쇄하는 것이었다. 이후 불가타 성서를 인쇄하면서 인쇄기의 단점을 보완했고 이후에 그의 기술을 통해 성서가 유럽에 보급된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역시 이 인쇄기술로 퍼져나갔다.
## 구텐베르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유럽의 금속활자는 체제유지에 저항했는가?
그가 인쇄기로 수익을 올렸던 방법은 면죄부를 인쇄하는 것이었다. ##
여기서 한 가지 아주 쉽고,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관(官)은 지배논리의 강화가 되는 정책 도입은 할 수 있어도 거대한 역사적 개혁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유럽의 지식혁명은 민간(民間)영역에서 발생한 일이다. 구텐베르그의 인쇄기는 사업을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당시 교회의 면죄부 뿐만 아니라 루터의 반박문도 인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첫째, 세종의 지식혁명은 '관(官)의 주도'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한글의 우수성 입증은 세종의 창제 단계에서 인식된 것이 아니라 이후 개량되고 보편적으로 쓰이는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다.
조선의 금속활자가 많이 인쇄한 인쇄물 중 하나는 경국대전이었다고 한다. 정도전에 의해 기틀을 마련하고 이후에 발전되어 조선의 가장 중요한 법전이 되었는데, 1485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개정된다. 조선왕조를 개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일부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 법전이나 유교 사상의 전파를 위해 사용된 인쇄술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유교가 조선사회에 정착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선 유교는 생각처럼 정착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문제를 대하는 태도 가운데에는 "유교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낡아빠진 유교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바로 조선 유학의 사상적, 이념적 경직성이다. 마치 중세 유럽의 기독교를 보여주는 것처럼 다른 계통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부터 원천봉쇄를 시도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논어를 직접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유교의 시조라 불리는 공자(孔子)의 사상은 매우 유연하며 수용적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있었을까? 그것은 생각보다 유교가 사회 전반에 자리잡지 못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세종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조선 초기 한반도에서 유교가 자리잡지 못했던 제한적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천 년 이상 자리를 잡은 불교의 영향력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사회 저변에는 불교적 정서가 깊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가 이념으로 유교를 내세운 조선의 국왕이 백성들을 위해 불교 문서를 만든 것은 오늘날에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의 기독교가 국가 이념이 되면서 가장 폭력적인 종교로 변질되었듯이, 역시 사람에 대한 사랑인 인(仁)을 강조했던 공자의 사상도 국가 이념이 되면서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
로마제국에 의한 철저한 통치 수단이 되었던 유럽의 기독교와는 달리 비슷한 기간 우리는 여러 차례의 개혁이 있었다.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유교에 기반한 조선이 들어섰고, 조선 중후기에는 기독교 수용자들이 생겨났다. 한국의 개신교단에서는 카톨릭의 흔적 탓인지 조선시대에 자체적으로 기독교를 연구하고 받아들이는 움직임을 무시하고 조선후기 선교사의 당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기독교는 몽고인들이 세운 원나라를 거쳐 이미 중국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고, 지성인들이라면 성서의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원천불가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종의 지식개혁을 가로막은 문제는 바로 이 잦은 패러다임 쉬프트의 시도였던 것은 아닐까? 정보의 전파 속도가 오늘날에 비해 더디고, 매체의 힘이 약했던 시대이니만큼 조선 후기가 되면 불교, 유교, 기독교가 공존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만일 유럽의 상황과 그들의 성서처럼 모두가 공유 가능한 것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둘째, 세종의 지식혁명은 보편적 사고를 정의할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이 지식혁명을 시도했다면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
그의 의지는 글자를 새로 만들고, 당시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세심한 부분을 건드리도록 만든 것이다. 한글창제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창제 3년후라 할 수 있는 1446년에 반포된다. 그 이후에 간행된 한글 문서는 무엇이었을까? 재미있게도 1448년 즉, 세종 30년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활자 인쇄술을 통해 간행된다. 역사적으로 이 문서를 최초의 한글 활자 문서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재미있는' 사실인 것일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찬불가이기 때문이다.
세종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조선 초기 한반도에서 유교가 자리잡지 못했던 제한적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천 년 이상 자리를 잡은 불교의 영향력 때문만이 아니라 여전히 사회 저변에는 불교적 정서가 깊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가 이념으로 유교를 내세운 조선의 국왕이 백성들을 위해 불교 문서를 만든 것은 오늘날에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한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 372년 경으로 보고 있다. 인도 동북부에서 불교가 발생한지 거의 천 년 가까이 지나서 일어나는 일이다. 비슷한 시기인 380년에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데살로니카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게 된다. 밀라노 칙령 이후 60년이 조금 넘어서 일어난 일이다. 이후 유럽은 계속해서 기독교 사회를 유지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지 기독교와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조선왕조는 기존의 불교적 가치관을 뒤집고 유교에 기반한 다른 패러다임의 도입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 천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불교를 넘어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조선왕조는 국가의 모든 것을 바꾼다. 여기에는 가옥의 구조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해당했고, 대다수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지식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해하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때문에 세종은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최초의 한글 활자 간행물로 정해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소위 말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 밸런스'가 비슷한 시기 우리보다 유럽에서 조금 더 좋았던 것이다. 완전한 혁신에 대한 열망과 현실적 상황의 언밸런스는 세종이 원했던 지식혁명의 발목을 붙잡았다.
따지고 보면, 세종의 한글 창제와 금속활자의 실용화라는 인류 역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지식혁명과 한글의 보편적 보습은 콘텐츠 부족으로 좌절된 측면이 클 것이다. ‘번역’에 관한 인식과 프로세스가 부족했던 점은 훌륭한 하드웨어들의 확장 가능성을 죄초시켰다. 우리 언어에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불교용어가 그렇게 많은 까닭도 천 년에 걸친 번역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족한 콘텐츠는 결국 인쇄기술의 발전은 물론 한글의 보편화도 성공시키지 못한 셈이다. 우리말 자체에 대한 이해의 깊이 부족은 오늘날까지도 굉장히 강하게 남아있다.
구텐베르그 인쇄술이 세계적 지식혁명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일어난 강력한 성서번역 의지 때문이다. 라틴어로만 볼 수 있었던 성서를 당시 기득권들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했던 노력은 모두를 위한 보편적 문서의 기틀을 만들었다. 한 예로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은 성서를 영어로 번역했다가 화형당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다양한 인도-유럽어족 언어로 번역된 성서 번역본들이 탄생했고, 이것은 조선의 기술보다 훨씬 조악한 구텐베르그의 인쇄기술을 통해 널리 퍼졌다. 언어적 다양성이 유럽에 비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한반도에서 지식혁명이 좌절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죽음을 무릅쓴 유럽인들의 노력보다 훨씬 많은 힘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정치적 상황은 이것을 더 악화시켰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지켜야 했고, 이러한 집착은 결국 밖을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글자와 활자인쇄술을 준비해두고도 새로운 글자도 없고, 활자 인쇄술도 우리보다 반세기 넘게 뒤쳐진 유럽이 만든 혁명을 해내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는 결국 '기존의 것이 유지시키는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다.
다시 돌아온 한글날을 맞아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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