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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 pictureBhang, Youngmoon

물의 감각 /w Music Group SE:UM /노트 #2 - 오히려 老子라면 格義가 아니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간결할 정도로 '격의불교(格義佛敎)'를 인도에서 전례된 불교를 4세기 경 중국의 노장(老莊) 사상을 기반으로 해석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게 만든다. 이것은 어떠한 내용을 간결•명확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단순화의 오류일 수 있다. 나는 세상 어떠한 것도 간단하게 기술되고 또한 간단하게 정의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진리에 대한 단순한 기술이라는 발상 자체가 일종의 무지한 낭만주의고 오만이라는 생각도 든다.


"격의불교(格義佛敎) 또는 격의(格義)는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인 위진시대(魏晋時代: 220-420)에 나타났던 불교 교리 이해 방법 또는 불교 연구 방법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老莊思想)이나 유교사상(儒敎思想)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다."


이 설명은 현재(2022/10/14 22:10)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wiki/격의불교)에 정리되어 있는 내용이다. '격의'를 어떠한 문제나 폐단으로 몰고가는 것 또한 매우 정치적인 행위에 가까울 수 있다. 나는 현재 일반적으로 격의불교를 설명하는 표현들을 해체해보면 - 화학적으로 분해해보면? - 오히려 너무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내가 처한, '문화교류' 혹은 '예술분야간 교류'와 같은 논의들로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장비들(?)을 사용해 격의불교의 분해를 시작해보자.



사진: 2017년 코카서스 아제르바이잔에서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가 갖는 의미


불교는 동아시아 문명에 굉장히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자리했으며, 일본 열도에도 구석구석 스며있다. 대륙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수용자의 역할을 해야했던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이 사건을 돌아보면 이것은 문명사에 전례없는 문화교류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 기원후 3세기 전후 -, 비슷한 '재해석'의 문제를 인도-유럽어권과 중국-티벳어권이 경험한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매우 다른 두 문화권은 분명 '다름'으로 설명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사고가 갖는 단계성이 함께 있으며, 그러한 단계성이 보여주는 각각의 '단계'가 갖는 비슷한 시기, 유사한 모습은 과연 '생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다시금 갖게 만든다.


어쨌든,

인도-유럽어 문명과 중국-티벳어 문명 사이에서 이루어진 천 년이 넘는 문헌 번역과 교류의 역사는 인류사 전반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굉장히 큰 사건이다.


헤브라이즘에 토대를 두는 그리스도교는 훗날 로마의 국교가 되는 근간에는 페르시아 - 알렉산드리아 - 로마로 이어지는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인도-유럽어' 문명이 오늘날의 중동 지역을 지배했던 역사적 배경이 자리한다. 군사행동을 통한 정복과 제국의 성립, 제국의 통치 기구에 의한 시스템 도입은 정치적 접촉면을 형성했으며 이것은 너무다 당연하게도 그 언어와 문화를 동반한다.


동일한 어족의 사상적 기반은 생각보다 수용하기 쉽다. 사고의 근간이 유사성을 띄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선악의 절대적인 이분법이 자리를 하고 있고, 헬레니즘의 존재론은 관념적 유무 개념이 있다. 이러한 문화적 영향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수 백 년에 걸쳐 스며들고, 종종 '히브리어'를 인용하는 '아람어'로 발신된 메시지를 '헬라어'로 기록한 복음서의 메시지는 이미 상당부분 유럽철학의 색이 스며있다. 유럽 그리스도교는 매우 동떨어진 두 문명의 융합이라기보다 이미 유럽식 사고를 충분히 수용한 사람들이 만든 콘텐츠의 재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를테면, 21세기 대한민국에는 미국문화와 영어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미국에 공급할 콘텐츠를 제작할 때 미국문화를 반영해 영어로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2천 년 전 레반트 지역의 현실적인 통치자는 이미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인 셈어군의 사용자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인도-유럽어'의 통치를 이미 5백 년 넘게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는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로 이어지는 인도-유럽어 사용자들의 지배에서 비롯된 역사적 상황이다. 앗시리아 이후로 고대 근동에서 널리 쓰이던 '아람어'가 셈어군에 속한다고 하지만 이미 인도-유럽식 사고방식은 구약성경 문체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영향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하늘의 하나님'과 같은 수식어는 부정할 수 없는 페르시아 문명의 영향이다.


이렇게 보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에 공통 뿌리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이는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헤브라이즘이라는 토양에서 자라난 인도-유럽문명이라는 나무다. 이것이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가 매우 결이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요인이다. 인도-유럽어 문명과 중국-티벳어 문명은 언어와 경전 문화가 전반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를 우선 고려해야 할 요소로 보아야 한다.


즉, 중국-티벳어권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문제는 인도-유럽어권에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는 문제와 상당히 다른 측면이 있다. 중국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문제는 유럽에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는 문제와 달리 '정치적 접촉면' 없이 일어난 일이다.



'노장'은 '노자'와 '장자'로 철저히 분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노장'을 하나도 묶는 관점은 사실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다. 학자 중에는 이것이 해방 후 한국사회에 유난히 깊게 남아있는 특이한 관점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김시천 교수의 연구를 그대로 옮겨와 이것을 설명하면, 그가 인용하는 Harold D. Roth의 연구에 근거해 '老莊'이라는 표현은 <회남자 淮南子>의 문장을 근거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회남자>에서는 노자를 42차례 직접 인용하고 있으나 <장자>는 단 한 차례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회남자> 집필 시점인 기원전 179~122년에는 <장자>는 아직 주류 콘텐츠가 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노장'은 위진 이후(post-Wei Chin) 학자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는 관점이다. 노자와 장자를 같은 계열로 보는 것은 위진시대 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향이다. 그리고 위진현학의 <노자> 해석은 처음 <노자>의 문장들이 쓰여지던 시점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위진시대의 노장은 노자와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자와 장자에 대한 이해는 주로 '위진현학', '펑유란'의 표현을 빌리면 '신도가 사상 Neo-Taoism'이다. 노자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기원전 5백 년 경의 사람으로 추정해 볼 때, 기원후 226년에 태어난 '왕필'과의 시대적 차이는 자그마치 7백 년이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동일한 단어나 문장도 매우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노자와 위진현학 사이에는 이미 전국시대의 '직하학', '황로학' 그리고 한나라 시대의 '경학'이라는 사상적 패러다임 혹은 담론의 중심점의 변화가 있다. 이런 맥락으로 추정해보면 이미 위진시대 현학자의 <노자> 해석은 본래의 의도와 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큰틀에서 보면 4번이나 변하는 학문의 패러다임 쉬프트로 등장하는 위진현학에서 비롯된 '노장'이라는 패러다임을 노자와 동일시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러운 끼워맞추기다.


중국 한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은 자신들이 '땅을 대표하는 세력'이라는 '오행설'을 당위성으로 내세운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국 통치의 중점에 둘 학문으로는 사실 '도가'보다는 인간의 정체성과 본성을 향해가는 '유가'의 학문이 더 유용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러한 경향은 강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적 편중'이 결과적으로 농민반란의 구실을 제공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통치자라면 양측에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한나라 멸망 이후 위진시대의 학문이 '도가'와 '유가'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은 그 시대적 상황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진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개념의 축적이 불러온 것인지 점점 관념적 絶對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점차 인도-유럽식 사고와 유사한 어떤 것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위진시대의 학자들은 노자의 시대와 달리 이미 상당히 추상화된 '유무'의 개념을 통합하려 했으며, '도가'와 '유가'의 통합적 메시지를 찾고자 했을 것이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결국 이념대결이 다시 발생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공들여 세운 국가는 또 다시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우주론을 논하는 사상이 아니었다


(나는 중국 학문의 전문가가 아니기에 나의 素養 안에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위진현학에서 그때까지의 '중국'을 구성하는 고민들이 그 모양을 잡는다면, '불교'라는 '인도'의 메시지가 중국에 들어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그때까지와는 매우 다른 사고방식을 낳게 된다. 사실 '격의'란 이 시점에 등장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왜냐하면, 그 사고방식은 노자와도 다르고, 계속해서 적어보는 직하, 황로, 경학, 현학과도 그 결이 매우 다르다. '격의'는 '노장'이라는 틀에 의한 불교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인도-유럽식' 불교 해석에 가깝다. 즉, 중국적이지 않는 면이 크다. 되려 이것은 인도인이 해체하고자 했던 인도인 사고의 문제를 중국인이 인도인적 관점에서 수용한 셈이다.


때문에 '격의'를 이해하려면 여기서 불교의 출발과 인도-유럽식 사고라는 요소들을 중국인들이 어떻게 만들어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생긴다.


4세기의 사상적 변동은 불교의 유입이라는 사건을 통해 추친력을 받는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역국가 화전(和田 Khotan) 지역의 문화 유입으로 <반야경>의 번역 시도가 중국 내에서 일어난다. 이것을 3세기 말의 사건으로 본다.


이러한 번역의 시도에서 중국인들이 사용한 언어가 오늘날 소위 '노장'이라 부르는 사고를 기술하는 언어 표현들이다. 이러한 시도는 약 반세기 후 '지둔(支遁, 314-366)'이라는 인물에 의해 정착된다. 지둔은 현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곽상'과 매우 다른 관점으로 장자를 해석하기도 한다. '곽상'의 해석은 '道'라는 표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노자와는 결이 매우 다르지만 중국적인 관점 즉, 絶對라는 관념이 자리하지 않은 사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變化日新"이라는 표현은 '독화(獨化)'라는 말로 정리되는 "개별성"에 대한 그의 긍정을 '변화'라는 운동성과 더불어 생각해야 함을 말해준다. 왕필도 곽상도 '有無'를 논할 때는 노자와 매우 다른 관점을 이미 취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도-유럽식 절대 관념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 안에서의 관념적 의미에서, 절대적 의미에서의 '有無'가 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둔'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노자의 有無가 세상 속에 나타나는 어떠한 원리와 같은 '운동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위진현학의 有無는 인도-유럽식 관점에서 언어와 실재의 불일치 같은 문제나 관념의 문제라기 보다는 '道'에 대한 언어표현적 접근의 난해함을 논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문자적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이해로 <장자> 천도편에 등장하는 '윤편'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도, <하상공>의 주석을 통해서도 유사한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왕필은 말 혹은 문자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은 상 image 을 통해 언어를, 언어를 통해 의미를 긍정하여 언어를 통해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둔'에 오게 되면 오늘날 우리에게 소위 철학적 담론으로 이해되는 '초자연', '진리'와 같은 것들이 나타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인도-유럽식 절대 관념의 중국적 토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둔은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의 오랜 전통적 사고인 '理'를 이해했고, 이것을 불교의 '法 dharma'와 동일시 한다.



衆妙之門과 有無


有와 無는 관계성이며, 세계는 이러한 관계성의 운동성 위에 '일어난다.' 노자가 사용했을 법한 門의 맥락은 어떠한 근원(origin)을 의미한다고 읽기보다 어떠한 구분을 말하는 즉, 出入의 문제로 보는 것이 당대의 맥락에 더 어울린다. '근원적' 요인을 상정하는 것은 매우 후대에 일어났을 법한 접근이다. 서양에서도 3세기 이후에 소위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이라는 것이 등장하여 플라톤의 철학을 일원론적으로 구축하는 시도가 일어나듯이, 노자의 철학도 3세기 현학에 와서 우주론이나 본성론의 옷을 입는다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직하 - 황로 - 한대 경학 - 위진현학 이후에나 등장하는 지둔의 '理' 관점에서 비롯되는 붓다의 '다르마 dharma, 法' 오독의 과정을 이렇게 풀어보면, 오히려 노자 당대의 관점, 노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다르마' 오독의 가능성이 훨씬 낮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된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하는 말로 '다르마 dharma'를 사용할 때 형이상학적인 어떠한 관념이 아닌 오히려 당대 인도철학이 가지고 있었던 소위 인도-유럽식 絶對에 대한 '중도적 입장'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格義' 토대가 놓여졌다. 이것은 중국 안에서 보면, 직하 - 황로 - 경학 - 현학으로 이어지는 패러다임 쉬프트와 더불어 서역으로부터의 불교 유입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다. 담담한 경험적 문제들은 이제 우주적 관념으로 바뀌었고, 학문은 자꾸만 어떤 신비로운 근원이나 우주적 원리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떠한 '선형적 인과'를 상정하는 사고방식은 그 실체가 심오한 어떤 우주적 근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진화한 영장류라는 아주 확실한 각인이다. 나무 높이 달려 단순한 방법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획득물을 손에 넣기 위한 전/후방 추론의 사고는 '원인'과 '결과'라는 두 개의 주요한 틀을 만든다. 즉, 어떠한 상황을 통해 그 상황이 일어난 원인을 추론하는 것과 어떠한 시도를 통해 그 상황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추론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주의 시점을 상정해보려는 시도란 결국 동산 중앙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을 시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의 감각 /w Music Group SE:UM /노트 #2>를 맺으며


중국학자 폴 드미에빌(Paul Demiéville)은 지둔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格義가 오히려 인도-유럽식 절대 관념에 가까워지는 해석을 가함과 동시에, 어쩌면 중국 사상사에서의 가장 오래된 논쟁인 可道의 논의의 불교적 형태가 頓悟/漸悟와 같은 논쟁을 촉발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인도의 경전전통에서 오히려 일반적인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들에 비해 대승초기 <반야경>의 간결하고 강렬한 특징이 중국인들의 경전전통과 '입맛'에 더 맞았음을 지적한다.


여기에 더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이렇게 불교에 대한 소위 인도-유럽식 관념적 해석을 가했던 4세기 중국의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를 몰랐다는 점을 지적하게 된다.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중국 내에서 인도-유럽식 관념들이 쏟아진 까닭은 당대까지 중국학문이 개념의 증대를 이루며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우주적 일자(一者)의 상정과 이 일자로부터 기원하는 3원리에 의한 세상을 그려낸 '신플라톤주의'가 본래 플라톤이 생각했던 일종의 '이원론'과 다른 생각을 내놓으며 퍼져나간 것은 3세기 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당시 고대 그리스의 여러 학파들의 논쟁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도가와 유가의 통합을 시도한 위진현학의 시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각 지역에서 이렇듯 유사한 흐름이 일어나는 것을 두고 혹자는 신비적인 해석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생각은 계단처럼 단계를 밟아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현실을 염두하고 있다면 이러한 정황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인간의 '창의성' 혹은 '창조성'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오해가 무지한 해석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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