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를 찾아 햇빛을 향해 수면으로 떠오르던
태고의 감각처럼 ...
개관 survey
사진 연작 <응시 凝視 Contemplative Contemplation>
이 연작은 "모든 개별 현상은 전제가 되는 환경과 분리될 수 없음"을 고민한다.
맥락에서 완전히 독립된, 절대적 의미의 ‘진리’란 망상이 라는 메시지를 담는다. 환경, 전제, 배경 또한 개별적으로 바라보면 현상들의 집합이다. 연작은 말 그대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작품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의 불완전성에 대한 시각화 그리고 인식의 불완전함에 대한 시각화로 구성된다.
생소한 공간 속 허공에 떠있는 느낌의 안쪽 사각형은 무시간적, 절대공간적 표현을 시도하지만, 이것은 겹쳐지는 두 사진의 ‘노출시간’ 즉,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맥락을 통해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절대성과 완전성의 추구란 발달한 인간의 대뇌 기능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부작용이다. 완전성의 추구, 절대성에 대한 갈망이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어지는 작품 두 점 속에는 색이 동일한 같은 작은 사각형이 위치만 조금 달리하고 있다. 위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색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을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순간들이 매번 미망(迷妄, fallacy)의 문 제를 수반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작업이다. 이것은 인간의 두뇌가 작동하는 매커니즘에 가장 흔히 활용되는 실험 중에 하나다. 경험적 상황을 통해 판단과 결정을 시도하는 두뇌는 새로운 상황이나 특정한 상황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관성이 있다.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매커니즘이 특정한 환경에서는 착각이라는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작품들을 통해 ‘정신’이나 ‘영원성’ 같은 언어 오용에 따른 개념들을 해체하고 싶었다. 세상의 근원을 묻는다면 다소 우물쭈물 할 수도 있겠으나 인간의 인식에 관한 부분을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인간은 반응체계’라고 대답 할 것이다. 인간은 사건의 응집이며 다층화된 네트워크이다. 환경이라는 장 field 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입자 particle 와 같다.
인간은 확실성과 지식을 동일시 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지만
오감과 인식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우리를 일관되게 잘못된 생각으로 이끈다.
더불어 불변하는 진리, 절대성 그리고 완전성과 같은 것의 추구란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발생한 일종의 부작용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인식의 문제에 관한 시각화’의 출발점이다.
작품에 사용된 수비학적 개념의 수용과 해석
이 사진 연작 <응시>는 각각이 66분, 33분 혹은 11분 7초 등의
장시간 노출 long-time exposure 기법으로 촬영된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찰나 刹那 Kṣaṇa (क्षण, “moment”)
한 생각이 생겨나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시간. 한 찰나 क्षण Kṣaṇa 에 생각이 생겨나고 उत्पाद Utpāda 사라진다 भङ्ग Bhaṅga. 120의 찰나를 1달찰나(一怛刹那, 약 1.6초), 60달 찰나를 1납박(一臘縛, 약 96 초), 30납박을 1모호율다(一牟呼栗多, 약 48분), 30모호율다는 1주야(一晝夜, 24시간), 따라서, 1찰나(刹那 कष् ण Kṣaṇa)는 1/75초가 된다.
마음
사람 마음의 성질은 요동치며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생겨나고, 머물고, 변화하고 또한 소멸하는 생주
이멸(生住異滅)을 경험하며 찰나에서 찰나로 흘러간다.
오만가지 생각
요동하는 마음이라는 장(場, field)안에 생각이라는 들뜸은 찰나에서 찰나로, 1초에도 75번이나 요 동친다. 11분 6초 동안 거의 오만번의 요동이 일어난다.
66분과 11분 7초
66은 고대근동의 수비학적 표현에서 선택된 숫자들이다. 11분 7초는 5만가지 생각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5만 찰나’의 시간을 의미한다. 마음의 상태와 고도의 집중된 명상적 상태인 삼매(三昧)에 들더라도 인간은 불완전하며 응집된, 다층적 네트워크 현상이라는 실존적 한계에 관한 기술적 맥락과 시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보색에 따른 착시현상
작품의 수정 - 촬영된 사진 재작업 과정 요약
처음 사진연작 <응시 Contemplative Contemplation>를 구상했을 때는 조금 더 단순한 표현 방식을 선택했었다. 처음 구상안을 표현으로 구체화하고 작업에 들어갔던 것은 2020년 4월의 일이었다. 한동안은 촬영이 가능한 장소(spot)를 찾아 인천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연륙교로 연결된 섬들을 거의 다 돌아보며 찾게 된 적절한 위치는 재미있게도 송도의 '솔찬공원'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 덕분에 적당한 높이를 얻을 수 있었다. 바다와 가까운 위치에 가면 지평선을 표현하는 것은 좋았으나 프레임 안에 다른 사물이 들어오지 않는 조건과 '내려다본다'는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장소는 없었다.
작업기 동영상 - 작품 배경에 대하여
작품은 두 번에 걸쳐 수정 작업을 진행했다. 하나는 개별 노출된 각 사진들을 한 장의 사진으로 겹치는 작업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방법을 다소 수정한 것이었다.
생각의 수정 - 개념화 프레임 벗기의 노력
항상성의 부재 the absence of constant 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한 찰나 刹那 Kṣaṇa (क्षण, “moment”) 즉, 순간성 개념은 아비다르마(阿毘達磨, Abhidharma)의 해석이다. 처음 11분 7초라는 아이디어에 함몰되어 이 부분을 놓친 것이 작품을 수정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계기였다. 아비다르마 불교의 개념화와 개념 증대는 "본질주의적 사고로 회귀하는 불행한 기류"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수많은 불만족과 불행의 원인이 될 때가 많다.
불교의 초기 경전들을 보면 현상들의 존재론적 본질을 분석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즉, 붓다의 오리지널로 갈 수록 본질주의적 사고나 존재론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비다르마 학자들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 즉 제법(諸法, dharmas)의 고유한 특성을 확정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아비다르마적 다르마'는 경험의 심리 그리고 물리적 구성단위를 건물의 벽돌과 같이 분해될 수 있는 세속적 실재의 근본적 요소로 정리하려고 했다. 이러한 노력이 진행됨에 따라 불교의 상당부분이 헬레니즘 철학과 유사해지는 경향을 띈다. 추상화라는 인간 특유의 능력과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공통된 언어 기반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인도의 문화가 고대 리시(rsi)들의 언어가 인간들을 통해 현현되는 것이라 믿었고, 인간을 통해 신들의 생각이 나타난다고 믿는 것처럼 유럽의 기독교 역시 목적론적 인과와 관련해 굉장히 유사한 접근을 한다. 인도 아리안들의 윤회와 유럽 기독교의 사후 세계는 달라 보이지만 나를 구성하는 '근원'이 있어 그것이 사후에도 지속되는 생각이라는 점에서 그 프레임은 사실 차이가 없다. 현상과 본질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도의 힌두이즘과 유럽의 기독교는 차이점 보다 유사점이 훨씬 많은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자성(自性, svabhava)을 확정했다. 이것은 실체와 속성을 구분하는 본질주의적 이분법을 도입하여 붓다의 무상과 무아의 교설을 손상시킨 것이나 다름 없다. 경량부 학자들은 제법의 찰나성을 역설하면서 설일체 유부의 견해인 실체주의에 반대하였다. 제법은 찰나생멸(刹那生滅)하는 것 point-instants 경량부 학자들의 인과관계 구성 노력 회피 수단이었던 것이나 역시 본질주의, 존재론적 접근 방법에 의존하는 방법은 다르지 않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했던 '찰나'라는 개념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어떤 표현이나 해석에서 아무런 개념도 갖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 따라서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이것을 다른 것과 연결해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찰나'와 '오만가지 생각'을 표현한 노출 exposure 을 안으로 넣고, 그 배경과 틀이되는 노출 exposure 에는 66분을 도입했다.
고대 근동 수비학과 아비다르마의 개념화를 섞다
이것은 각각 다른 곳에서 가져온 생각들이다. 오만가지 생각은 아비다르마 불교의 순간성 개념에서 비롯되어 우리가 일상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가져 온 것이며, 66은 고대근동의 수비학에서 '불완전수'를 표현되는 숫자를 가져 온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표현되는 666과 같은 숫자는 이러한 표현에 충실한 방식이다. 3이라는 완전수와 6이라는 불완전수의 조합을 통해 3번 등장하는 6은 '매우 부적절한 무엇'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순간성 즉, 찰나 (刹那 Kṣaṇa “moment”)를 말하는 것은 아비다르마(阿毘達磨, Abhidharma) 즉, 상좌부, 유부에 서 ‘논장’을 완성해 삼장(三藏, Tripitaka)을 구성하면서 도입되는 개념이다. 초기불교 경전의 삼장 중 경장(經藏 Suttapitaka)과 율장(律藏 Vinayapitaka)은 붓다의 가르침을 최대한 그대로 암송하여 구전한 것들이라면,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은 이론적 해석의 도입이다.
연기(paṭicca samuppāda)에 의해 드러난 ‘무상함’은 후대에 개념화의 퇴행을 겪는다. 11분 7초 노출 사진은 5만 찰나 즉, 5만가지 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 마음의 불완전성을, 66은 개념화에 의한 왜곡과 인간 인식의 근본적인 불완전성의 시각화다. 고대 근동의 수비학과 아비다르마의 개념화를 섞어 생각의 불완전성을 시각화한다.
인간 인식 속에서 생성되는 응집체인 개념화에 대한 시각화 시도가 연작의 한 작품 노출 제 4번과 6번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지와 인식의 불완전성을 추가하다
다른 한 가지 문제는 인지와 인식의 불완전성에 관한 것이다. 미시계에 대한 거시계의 꽤나 부정확한 활동 같은 물리학 연구와 관측을 굳이 꺼내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생물'이라는 입장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해 온 우리 자신의 '인지'가 정확성과는 거리가 멀 때가 자주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명상가들이 밧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거나, 숲 속에서 수행하던 중 늦은 시각 주변에서 소리가 들릴 때 일어나는 공포감을 다스리던 것에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뇌 기능에서 비롯되는 것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고, 그 사례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심리적 실험을 통해서 기존의 정보를 조합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종종 적절하지 못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례들을 알고 있다. 나는 연작 작업 계획 수립 단계에서 성공한 두 장의 사진을 배치해 보던 중, 같은 색을 약간의 위치 변화로 매우 다르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자주 설명해주는 것 중에 하나가 뇌가 어떻게 시각정보를 보정하는가에 관한 것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구에서 망막과 혈관의 위치가 있는데, 구조적으로 보면 인간은 망막 위에 위치한 혈관의 그림자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안구의 지속적인 운동과 뇌의 보정 기능이 이것들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마찬가지로 코와 같은 신체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 안경착용자가 그 착용 기간이 길어질 수록 안경에 대한 불편함이 사라지고 적응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양쪽 눈에는 각각 하나는 우뇌, 다른 하나는 좌뇌와 연결된 시신경 두 개가 있다. 시신경은 뒤로 나아갈 수 있는 최대 한계인 뇌 뒤쪽 표면 시각 피질까지 나아간다. 시신경은 눈이 본 내용을 10분의 1로 압축한 다음 그 정보를 뇌의 중심에 있는 선조체로 전달한다. 그 정보는 선조체 중심의 다음 정거장인 기저핵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300분의 1로 압축된다. 이곳이 눈이 무엇을 보았는지 발견하고 그와 관련하여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부위이다. 망막에 표시된 내용 중 3,000분의 1만이 여기까지 다다른다.
우리 뇌는 사전 지식을 더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가정하면서 무엇을 동과시킬지 선택한다. 뇌는 중요하지 않은 내용과 바뀌지 않은 내용을 뺀다. 뇌는 우리가 알게 될 내용과 그렇지 않을 내용을 결정한다. 이 정보처리 과정은 강력하다. 뇌가 더하는 내용은 실체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뇌가 뺀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일 수 있다." - Kevin Ashton
우리가 착시현상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이것은 인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매커니즘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착시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한 측면은, 우리가 세상을 잘못 보고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ㅣ다. '가시광선'이라는 한정된 파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유입되는 정보로 인해 과부하에 걸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지와 인식의 불완전성을 탓하며 살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인지와 인식이 불완전하기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쥐어짜낸 연작 결론 내기
[1]
인간은 확실성과 지식을 동일시 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지만,
오감과 인식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우리를 일관되게 잘못된 생각으로 이끈다.
[2]
불변하는 진리, 절대성 그리고 완전성과 같은 것의 추구란,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발생한 일종의 부작용과 같은 것이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지와 인식의 불완전성을 탓하며 살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인지와 인식이 불완전하기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더 깊이 들어가기
인간의 사고는 언어라는 그릇에 담기는,
끊임없이 개정되어야 할 무엇이다
주부-술부로 이분화 되는 인간의 언어는 우주질서를 선형적 인과 linear causality 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간 인식의 틀은 어떠한 혹은 만물의 ‘근원적인’ 혹은 ‘본질’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만들고 제일원인(第一原因, The first cause)을 향해 무한소급해 나가는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된다.
근원과 본질에 대한 해답의 갈구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철학적 프로세스가 사라지면 그 공허한 느낌은 자기우월감과 같은 더 해로운 생각들로 채워진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는 그러한 것들을 통해 분쟁을 야기해왔던 우리 자신들의 마음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인과에 대한 이해, 논리적 사고의 프로세스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고, 원하지 않는 것을 피하기 위한 생물학적 기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N. Whitehead)는 <이성의 기능 The Function of Reason>에서 이성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HE FUNCTION OF REASON IS TO PROMOTE THE ART OF LIFE
I now state the thesis that the explanation of this active attack on the environment is a three-fold urge:
To live
To live well
To live better
간단히 말해 이성의 기능은 삶을 증진시키는 생물의 기술이다. 삶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공격을 통해 이것을 성취한다. 지능을 가진 고등한 생물이라면 단순히 '산다 to live'는 단계를 넘어서서 '더 잘 산다 to live better'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 아닌 환경을 능동적으로 개변해 나가는 단계로 전환된다.
'생각'의 탄생
생각의 첫 번째 요소는 개별적 경험을 추상적으로 다루는 인지능력이다. 생각의 두 번째 핵심 요소는 인지적 표상으로부터 추론하는 능력이다(마이클 토마셀로). 이것은 인간 외에도 지구상 생명체 중 가능한 종(種, species)들이 존재한다. 인간은 여기에 더해 다양한 공유의 도구를 발달시켜 다른 종들과 격차를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상징, 기호 등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 도구들의 발달이다.
사실과 역사적 맥락에서 소통 방법의 발달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아직까지 음성언어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시각기호 그리고 순수추상 기호 이상의 의사소통과 생각의 도구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과 본질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몸과 영혼을 별개의 존재처럼 느끼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보다 인간의 발달한 두뇌가 만드는 중간단계적 '방황'과도 같은 것이다.
완결에 대한 충동 문제는 우리의 지능의 뿌리가 '시뮬레이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수렵, 채집, 사냥의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것은 거의 다수의 포유류에게 가능한 기능이다. 오른쪽에서 공격하면 왼쪽으로 도망갈 것이라는 것에서부터 어떠한 도구를 이용하면 물체를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까지 인간 외의 생물체들이 할 수 있는 지적활동이다. 우리의 생각이 이러한 '시뮬레이션'에서 비롯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왜 완결에 대한 충동이 강한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소통 능력이 발달은 재귀적(Recursive) 지능과 상호협력을 위해 동일한 상징체계를 다른 개체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상호간 시도하고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고도화된다. 상대방의 의도파악, 나의 의도 전달은 물론 상징과 재현, 더 나아가서는 추상적 기준과 소통의 틀을 발달시킨다. 타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소통의 구체화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소통과 공감이 고도화 될 때 자기인식과 그 의문 또한 강해지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기 편하게 인과이해와 시뮬레이션 그리고 기본적인 수준의 의사소통 능력을 '유인원 지능'이라고 보고, 생각과 의도의 공유와 이해, 기호와 추상화 능력의 발달을 '인간 지능'이라고 분류해보자. 유인원적 시뮬레이션과 무한과 0과 같은 추상화 능력의 어정쩡한 결합은 시작과 종말 같은 종교적 사고를 낳는다. 적절한 귀납적 추론을 도출할 수 있는 데이터의 부족이 낳은 상황이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피곤하면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처럼,
'시작과 끝'을 상정하는 것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고등화의 계기를 얻은 우리 몸의 본성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더 세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사회적인 틀을 반영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언어가 어떠한 초월적 일원자(超越的 一元者), 어떠한 초월적 존재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물의 사회성 발달을 통한 생존 추구의 맥락에서 발달했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을 위해 오랜 세월 발달해 온 인간이라는 생물의 지능 특징은 그 구조상 시작과 완결을 추구하도록 되어있다. 몸의 본성 같은 것이다. 때문에 제일원인적 가치를 추구하고, 선형적 인과, 과거 - 현재 - 미래와 같은 프레임에 빠진다.
관조적 응시 Contemplative Contemplation 의 과정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방향성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본래 중립적 공간이란 무중력 상태다. 인근에 큰 질량을 가진 물체가 있으면 공간이 휘어져 중력 효과가 발생한다. 중력 효과가 발생하는 지점에서는 위와 아래가 생긴다. 위와 아래가 생기면 좌와 우가 생긴다. 이렇게 사방팔방이 생기면 방향성이라는게 생긴다. 방향성이 생기면 관점이라는게 생긴다. 관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모든 편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나의 연작 <응시>가 추구하는 관조적 응시는
이러한 수많은 요소들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알아차림" 같은 것이다.
방향의 수정 **
첫 방향의 수정 - macroscopic
먼 옛날 베다(वेद;Veda)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빌려, 바다 위로 해가 지는 동안 바다의 물결을 사진에 담는 나의 행위를 카르마(कर्म; karma)라 불러보겠다는 관점은 전형적인 인도철학을 작품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시도였다. 촬영 단계의 작업은 분명히 이러한 관점에 충실해 진행하였다.
인도철학에 대한 관점은 우리가 불교를 통해 인도의 문화를 굉장히 큰 폭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의 문화 원형이 인도에서 시작된 것들이 매우 많이 있다. <별주부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문화 원형은 물론 우리나라의 수많은 민간 설화들이 불교의 전례와 그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들이 상당 부분이다. 소위 '한자문화권'으로 불리우는 동아시아가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은 약 천 년에 걸친 번역작업에 의한 것이며, 인도-유럽어와 시노-티베탄어의 대대적인 문화교류임과 동시에 한반도 문화에도 큰 폭의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속에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지거나 사용된 '용어'들이 엄청나게 많이 스며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일종의 진입로 gateway 를 그러한, 일상적으로 활용되는 불교용어를 이용하여 구성해 보자는 것이 작품 구상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불교가 차용한, 당시 인도에서 보편적이던 사고 방식들을 찾아 그 맥락을 이해하는 시도를 하다보니 오히려 그러한 인도-유럽어족 특유의 존재론적 접근 방식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경향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불교를 통해 수용한 인도의 문화와 불교에 대한 그 원형의 이해를 시도하려다보니 베다와 브라흐만 제식과 같은 그 이전 문화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했고, 그러한 원형에 대한 탐구와 어원적 접근을 하다보니 표현 전체가 인도 철학과 산스크리트 단어들로 채워져 버린 것이다.
균형의 추구를 위해서 세부적인 정보를 포함시키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나, 반대로 모든 것을 너무 미시적인 층위까지 파고 들어가다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유럽식 학문의 수용을 통해 우리에게도 '본질'과 같은 개념이 기본적으로 정착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상과 본질을 분리해서 보는 훈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오랜 기간 우리 동아시아 문명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도덕경>의 첫 구절은 현대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언어와 실재의 불일치라는 철학적 주제와 관련된 논의라기보다, 道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즉, 문자 전달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초기의 주석이며, 왕필에 이르면 言(말 혹은 문자)이 意(뜻)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속되지만, 결국은 言을 통해 意를 얻을 수 있다는 논의로 전환된다고 보고 있다(김시천). 20세기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소위 동서양의 철학 개념을 모두 뒤섞어 도덕경과 같은 텍스트로부터 '언어와 실재의 불일치'를 도출해내지만, 이는 오히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관점인 것이다. 즉, 개념과 사실의 이분법적 접근은 우리가 서양학문이라는 추가된 정보를 통해 도덕경을 이해하는 방법인 것이다.
언어와 실재의 불일치 혹은 개념과 사실의 분리, 현상과 본질의 이분법적 접근은 전형적인 유럽의 접근 방법이었다.
두 번째 방향의 수정 - microscopic
현상과 분리의 이분법적 접근이 유럽인들에 의해 보편적인 사고방식처럼 전세계에 퍼져나갔지만, 이러한 생각에 오랜 세월 집착했던 것은 인도 아리안들의 조상이었다.
언어는 대개 지역이나 민족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인다. 한국어와 같이 지역 이름을 붙인 것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렇게 보면 산스크리트(Sanskrit)어는 매우 이상한 이름이다. 의미라는 맥락에서 '산스크리트'는 '준비된 말'을 의미한다고 본다. 제식을 위한 언어 이외의 문헌에서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된 기록물은 거의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 힌두교의 다신교적 관점은 모든 것에 자아를 부여하는 언어적 특징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이 사물, 공간, 사태를 즉물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다양한 신을 만들어 냈다면, 인도인들은 세상 모든 것을 추상하기 위해 다양한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인들의 방식은 매우 강력한 주부 - 술부 분리에 의한 사고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러한 특징은 마가다어나 팔리어권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선종의 조사로 보는 달마(போதிதர்மன், 菩提達摩) 대사의 출신지역을 남인도 칸치푸람으로 추정한다는 역사적 사실은 여기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해당 지역은 드라비다어 권역으로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혹은 마가다어 등이 속하는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와는 매우 다른 언어를 쓰는 곳이기 때문이다. 드라비다어 화자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전승을 배워 중국에서 시노-티베탄 어족 문화에 스며드는 과정이 선(禪, zen)의 탄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서 적어둔 것처럼, 붓다의 깨달음에 있어서 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본질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아비다르마 학자들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 즉 제법(諸法, dharmas)의 고유한 특성을 확정하려고 시도했다. 가끔씩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묶는 것처럼 인도-유럽어권역 전체의 사상을 유사한 방식으로 묶을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매우 비슷한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앞서서 적었듯이 '아비다르마적 다르마'는 경험의 심리 그리고 물리적 구성단위를 건물의 벽돌과 같이 분해될 수 있는 세속적 실재의 근본적 요소로 정리하려고 했다. 그리스에서 발현한 원자론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은 "본질주의적 사고로 회귀하는 불행한 기류"로 해석된다.
따라서 아비다르마의 방식인 찰나 刹那 Kṣaṇa (क्षण, “moment”)에 대한 작품에의 수용을 바꾸는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 셈이다. 왜냐하면, 처음 찰나에 대한 어원 분석만 시도했을 때는 이러한 맥락 즉, 본질주의적 사고로 회귀하는 불행한 기류라는 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면체 탐구 Exploring Polyhedron>의 구상에 있어서 인도철학적 아이디어와 그 맥락들은 내게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이것을 빨리 버리려고 하는 시도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면체탐구 및 작가 소개 - 이화여대 STC 프로그램, 2019
나는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66이라는 불완전수 프레임 안에 '찰나'를 밀어 넣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애초에 마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로부터 고요함을 추구해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 또한 사건 네트워크의 응축된 덩어리이며,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건들이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대상이 있어 그것이 '움직인다'한 들 그것에 대한 설명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정리하며
이 연작은 현상은 전제와 뗄 수 없음을 고민한다.
맥락에서 완전히 독립된, 절대적 의미의 ‘진리’란 망상이라는 메시지를 담고자 한다.
말 그대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인간은 확실성과 지식을 동일시 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지만
오감과 인식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우리를 일관되게 잘못된 생각으로 이끈다.
더불어 불변하는 진리, 절대성 그리고 완전성과 같은 것의 추구란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발생한 일종의 부작용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인식의 문제에 관한 시각화’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지와 인식의 불완전성을 탓하며 살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인지와 인식이 불완전하기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피곤하면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처럼,
'시작과 끝'을 상정하는 것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고등화의 계기를 얻은 우리 몸의 본성 같은 것이다.
따라서 나의 연작 <응시>가 추구하는 관조적 응시는
이러한 수많은 요소들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알아차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인식의 문제에 관한 시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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